타락한 교회는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민초들의 삶은 전염병에 더해 교회의 착취(‘면벌부’ 판매)에 시달리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때 에라스무스를 위시한 일단의 인문주의자들이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온건개혁은 극에 달한 민초의 분노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분노의 격랑이 휘몰아칠 때 이성주의와 지식주의는 무용지물이었다.

루터는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민심은 온건한 인문주의 대신 루터의 종교개혁에 매료됐다. 그가 비텐베르크대학교 부속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은 대량 인쇄돼 전국에 뿌려졌다. 종교개혁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딱딱하고 무거운 라틴어 갑옷을 벗고 쉽고 친숙한 평상복(독일어)으로 갈아입은 성경은 교황과 성직자의 권위에 짓눌렸던 민초에게 성서주의와 은총주의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일깨웠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곧 종교전쟁으로 이어졌다. 구교와 신교로 나뉜 교회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숱한 생명을 앗아갔다.

16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격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내전인 위그노전쟁, 스페인 절대주의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의 전쟁과 독립 등이 모두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17세기에는 30년 전쟁(1618~1648)으로 유럽 전체가 피로 얼룩졌다. 특히 유럽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이 전쟁의 중심 세력으로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종교전쟁은 더 이상 신앙을 위한 다툼이 아니었다. 집단적 광증의 표출이었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즉 신앙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전쟁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은 광증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그때였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외면 받던 인문주의는 종교전쟁의 집단광증이 극에 달한 때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성이 마비된 종교는 더 이상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 터였다. 사람들은 이성의 힘에 한줄기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인문주의는 반목과 갈등, 대결 대신 관용과 타협, 온건함을 옹호하고 끝까지 실천하려 노력했다. 존 로크는 명예혁명의 경험을 설파했고,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과격성에 맞섰으며, 몽테뉴는 신교와 구교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다. 볼테르는 똘레랑스(관용)를 부르짖었고, 루소는 사회개조를 주장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부르댔다.

인문정신의 총아는 ‘똘레랑스(관용)’였다. 이념이 극단으로 대립한 시대에 몽테뉴는 중립적 태도와 뛰어난 지적 균형으로 온건한 중도의 삶을 살았으며 시대의 불안을 치유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인문주의가 잉태한 똘레랑스(tolerantia)는 계몽의 시대 서구 정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갔다.

15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해이다. 그로부터 500년이 흐른 뒤인 2017년, 대한민국은 1천700만 촛불의 염원을 담아 정치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루터가 낡고 타락한 교회의 개혁을 외쳤다면, 지금 우리는 사회 도처에 만연한 적패청산을 염원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500년 전 유럽의 종교개혁은 종교전쟁으로 비화했고, 뒤늦게 이성주의의 중재 노력에 힘입어 이성의 시대로 거듭났다. 인문주의와 이성주의는 피 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진 뒤 한발 늦게 힘을 발휘했다. 지금 우리는 정치개혁과 적폐청산이라는 당면과제와 동시에 화합과 통합의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500년 전 유럽처럼 자칫 우리도 끝 간 데 없는 반목과 갈등, 살육의 전장으로 비화할 위험에 처해 있다. 피할 방법이 있다면 피해야 한다. 어찌할 것인가.

촛불의 시대적 요청은 분명하다. 민심은 확실한 적폐청산을 요구한다. 그러나 반목과 갈등만 되풀이해선 안 된다. 적폐를 넘어 국민 화합과 상생으로 전환할 모멘텀이 필요하다. 그래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강력한 완력이 아니라 통합과 상생을 위한 이성의 힘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작은 차이에도 곧바로 삿대질을 일삼는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구악이라는 말, 적폐라는 말 앞에서 합리적 논의와 이성적 비판은 설자리를 잃는다. 촛불정신을 받쳐줄 이성과 인문정신이 조속히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종교전쟁을 촉발했고, 똘레랑스의 가치를 일깨웠다.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불러왔지만 숭고한 혁명정신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했다. 4‘19혁명은 5’16쿠데타로 군부정권을 탄생시켰고, 6‘10민주항쟁은 신군부의 정권연장으로 이어졌지만 시민의식을 일깨웠고, 종내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다. 촛불정신은 더 없이 숭고하다. 그 숭고함이 올바로 발현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에겐 이성의 힘, 인문정신의 고양이 절실하다.

최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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