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실시하는 비정규적 사회교육 기관 ‘야학(夜學)’.

이 학교에는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글과 공부를 배우려는 노동자와 부녀자 등 소외계층이 주를 이뤘다.

‘요즘 세상에 까막눈이 어딨냐’는 농담 섞인 말을 하는 사람들조차 사라져가는 현재에도 야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지난 35년간 야학에 몸을 담은 수원제일평생학교 박영도(59) 교장. ‘야학 없는 세상’ 만드는 게 소원인 그는 지난해 10월 평생교육의 노벨상인 ‘세계평생교육 명예의 전당(IACEHOF·International Adult Continuing Education, Hall of Fame)’에 헌액되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소외계층에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는 박 교장을 만나봤다.



-처음 야학교사를 하시게 된 계기와 평생학교장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제가 대학 2학년때인 1979년도 가을에 선배가 ‘갈 곳이 있으니 같이 좀 가자’고 해서 따라간 곳이 대구의 야학인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생들의 봉사측면의 문화였고 대학의 낭만이었습니다. 때문에 대학생들이 주를 이뤘던 야학 교사들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들은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0년에는 군에 입대 후, 1983년도에 복학한 후에도, 야학 교사를 병행했습니다. 27살에는 교장을 하기도 했는데 4년이 채 안되게 활동을 하다 1985년 수원 농진청으로 취업을 왔습니다. 당시 맡았던 학생들이 있어 주말이면 대구에 내려가 수업과 행사 등을 실시해 졸업을 다 시켰습니다. 야학은 그렇게 끝날 듯 했지만, 또 인연은 됐습니다. 1988년 서울 광동제약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이직을 했는데 동료 여직원이 야학 교사를 하고 있는데 결혼으로 교사를 못하게 됐다고 대신 맡아달라고 하는데 귀가 솔깃했습니다. 서울 YMCA부설 청소년학교(야학)에 가서 인수인계를 받고 다시 교사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1991년에는 오산에 있는 회사로 직장을 옮겼는데, 야학에서 교감까지 맡게되며 매일 기차와 전철을 갈아타며 야학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성균관대 역 인근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 1시가 넘었습니다. 1년 넘게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직장 업무때문에 그만 두게 됐습니다. 야학을 7개월정도 쉬었을 즘이었는데 수원역에 내렸는데 운명같은 3번째 야학이 다가왔습니다. 전봇대에 수원제일야간학교(현 수원제일평생학교) 교사 모집이 붙어있더라고요. 그게 1994년 11월이었습니다. 당시는 조원동에 있었고 중고등과정을 수업하던 학교였는데 10여 명정도의 학생이 있었고 교사는 6명으로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운영 등 모든게 힘든 시기었습니다. 더욱이 다음해 9월에는 불까지 나 건진 것은 반 이상 타버린 교무일지와 출석부, 라면 1박스만 주워들고 나왔습니다. 이후 고등동성당 지하 교리실을 빌려 3개월 동안 겨울을 나며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교사와 졸업생, 재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일일 찻집을 열어 어렵게 500만 원을 마련했습니다. 이 돈으로 수원 평동에 있는 개척교회의 한 층을 빌려 다시 학교 문을 열었습니다. 회사 직원에게 부탁해 전기 공사를 하고 비행장 등에서 폐목재를 구해 교실을 3개를 만들어 썼지요. 여러가지 어려움이 겹치면서 교사들이 하나둘 떠났고, 당시에는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아 36세에 교장이 됐습니다. 1999년도에는 다니던 회사가 IMF로 인해 휘청거려 벤처회사를 세웠어요. 사장이 되면 시간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학교 자금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나마 회사가 잘 돼서 사비로 비품 등을 구입하거나 교직에 교사분들께 부탁해 모셔오는 등 학생들이 공부하기 위한 환경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2000년 넘어가면서 규모도 많이 커졌습니다. 이후 수원시의 도움으로 세류동으로 한번 옮겨 10년 정도 공부를 하다 2011년 현재의 매교동 자리로 새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경북 구미의 농가에서 태어났어요.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네요.”



-35여 년 동안 야학에 몸을 담으면서 많은 제자들이 거쳐갔는데 그동안의 보람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면.

“이 학교에서만 졸업한 학생은 3천300여 명이고 35년간 졸업시킨 학생까지 하면 총 5천여 명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곳에서 공부해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가신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2의 인생을 펼치게 되신거죠. 하지만 진정한 저의 보람은 또 다른 곳에 있더라고요. 본인의 이름조차 못쓰시는 분들이 많이 오시는데 그 분들이 이 곳에서 글을 배워 살아가시는 것들을 보니, 어려서 ‘남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보람이 느껴지더라고요.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됐는데 그 얼마나 새로운 세상을 맞은 기분이시겠습니까. 스스로들을 눈뜬봉사라고 하시며 다니셨는데요. 또 검정고시 반에서 공부를 하셨던 분은 얼마전에 요양원에 취직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내는데 학력란에 고졸이라고 쓰면서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옛날의 야학과 지금의 야학은 많이 다릅니다. 옛날에는 능력은 있지만 돈이 없어 야학에서 공부했던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한의사나 치과의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죠. 그야말로 청출어람이죠. 야학 교사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칭찬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행복했고 행복합니다.”



-기억에 남는 추억이나 학생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나요.

“우리 학교의 학생 97%가 여성입니다. 대부분이 한국전쟁이나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못받으신 분들이죠. 겨울철이 되면 매년 김장해서 나눠드시는 걸 보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맛있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분은 65세 여성분이신데 삶이 고되신 분이었습니다. 두번 결혼을 했는데 둘다 실패하시고 가족들과는 연락마져 다 끊어진 상황이죠. 치매 증상까지 보이고 계세요. 그런데 최근까지 4년동안 낮에 학생들 없을때 여름이고 겨울이고 복도와 계단, 교실 청소를 해주세요. 이 학교에서 글도 배우고 공부를 하는데 해주실게 없으시다는 거죠. 말려도 해줄 수 있는 것, 잘하는 것은 청소밖에 없다고 해주시는데 너무 고맙죠. 또 한분은 지적장애가 있으신 50대 여성분이신데 저희 학교에서 중·고등 검정고시를 보시고 명지대 사회복지과에 들어가 한 장애인복지센터에 취업이 되셨어요. 처음 오셨을때는 말도 잘 못하시고 옷도 허름하셨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회생활 하시면서 화장도 하시고 행동도 조심하세요. 행사때는 후원도 해주시는데 교육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야학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분들이며 어느정도 수준의 수업이 이뤄지나요.

“한글을 처음 배우는 초등학교 단계부터 중학교과정 전 문해교육, 중·고등 검정고시 수준까지 진행이 됩니다. 어르신들만 저희 학교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다문화 가정 학생들이나 가출 청소년들 등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요. 특히 결혼 이주 여성들도 오시는데요. 이분들은 배우지 못하면 자녀에게 대물림 됩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들은 굉장히 좋은 자산이에요. 우리 나라에 야학이 필요없는 세상을 만들때까지 열심히 가르칠 것입니다.”



-현재 평생학교를 운영하면서의 어려움은 무엇이 있나요.

“이제는 야학도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1천500여 개의 야학이 존재했지만, 현재는 300여 개가 될까말까 합니다. 경제적이 이유가 가장 크죠. 수원에도 1980년대에는 8개의 야학이 있었는데 우리 학교 외에는 남아있질 않아요. 학생이 300여 명정도 되는데 연간 1억 6천 정도 들어요. 학교 행정 관리 직원 인건비, 임대료 등 하면요. 전체 운영비에 30%는 시에서 프로그램 운영비로 지원해주고 30~40%는 대외적인 사업을 따와 충당을 하고 있습니다. 10%정도는 학교를 졸업하신 분들께서 지원해주시고 나머지는 제가 사비로 메우고 있는데 그 금액만 3천여만 원정도 됩니다. 20년이 넘게 매년 이렇게 해왔어요. 개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가능한 일이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죠. 늘 부족하고 아쉬워요. 다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사라져 가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야학의 도움이 필요한 손길은 계속 늘고 있어요. 수원뿐만 아니라 화성, 오산, 의왕, 멀리는 평택 등지에서 우리학교를 찾아오시는데 정원이 넘쳐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럴때면 너무 속이 상합니다. 사실 이 같은 일은 국가가 해야하는 부분들인데, 전혀 도움이 없다보니 안타깝죠. 야학들이 문을 닫을때 우리 학교는 50년 넘게 이어왔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지난해 ‘세계평생교육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는데요 헌액 되게 된 이유와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것입니다. 저를 포함 6명인데 문용린 전 교육부장관(2007),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2008), 최운실 아주대 교수(2010), 고 황종건(2013) 전 명지대 교수 등에 이어 정지웅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저는 이분들께서 쓰신 책을 보고 공부를 해왔는데 어리둥절 하면서도 영광스럽습니다. 이번 회의를 수원에서 개최했고 이번 심사부터는 현장에서 평생교육에 노력하는 사람을 선정한다는 기준이 높아져 공로를 인정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 학교에 오시는 분들은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이 많은데 많이 외로우시거든요. 그분들의 사정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동성기자/estar@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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