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개봉 한 달여 만에 65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이대로면 천만도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가장 뜨겁게 반응한 계층은 50대다. 이들은 그 시절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다. 그만큼 내 얘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정치권도 앞 다퉈 관람했다. 여야의 단체관람을 비롯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당사자인 경찰과 검찰도 다녀갔다. 문 대통령도 얼마 전 참모들과 함께 관람하고 눈물을 흘렸다.

87년은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타올랐던 때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와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됐다. 시위현장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서슬퍼런 공권력 앞에 인권은 없었다. 그 해에만 수백명이 시국사범으로 구속됐고 언론도 통제 속에 숨을 죽였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처럼 가혹한 언론통제는 사라졌다. 대신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뉴스가 전파된다. 시위 현장엔 전경버스 차벽 위로 꽃잎이 피어나고 유모차와 아이들이 ‘촛불의 바다’를 이룬다. 국회의 견제는 매섭고 부정과 비리엔 현직 대통령도 예외가 없다. 그때의 핏빛 항쟁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힘겹다. 물처럼 공기처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지만 세상살이는 아직도 쉽지 않다. 오히려 경제적으론 더 엄혹함을 느낀다. 투잡·쓰리잡을 뛰어도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다. 2030세대는 살인적 취업난과 혹독한 경쟁 속에 절망을 거듭하고 있다. 극심한 양극화와 1천400조대의 가계부채 폭탄은 위험수위를 넘어 째깍째깍 목을 조여 온다. 그 사이 자살율과 출산율은 세계 최고와 최저의 안타까운 1위를 지속하고 있다. 급기야 미래에 대한 한줄기 희망이라며 도박성 가상화폐에 수백만이 빠져들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뤘지만 근본적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그때의 주역들, 이른바 386들은 잇따라 정계로 진출했다. 현재 국회의원의 절반 이상이 386이다. 청와대와 정부기관에도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정치가 민생의 발목을 잡는 현실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1월 현재 국회 서랍에 잠자고 있는 민생법안만 7천 건이 넘는다. 처리율은 20%에 불과하다. 국민들은 애가 타는데 당론만 고집하며 네 탓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자기들 보좌진 늘리는 것은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회기 중 외유성 해외출장을 다녀와도, 단 한 건의 법률안을 발의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월급과 수당을 챙겨간다. 그토록 격렬히 저항했던 기득권 정치세력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오죽하면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그 광장에 모여 외쳤던 사람들, 소위 386들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았나. 대체 그 순수함은 어디로 갔느냐”고 되물었다.

이제 80년대식 정치로는 사회를 제대로 이끌 수 없다. 어차피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건 마찬가지다. 단지 이를 실현할 방법과 속도 등에서 의견이 다를 뿐이다. 끝나지 않을 진보와 보수의 정쟁을 멈추고 진정 민생을 위하는 일에 진력을 쏟아야 한다. 지지자를 위한 정치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정부는 ‘을들의 전쟁’으로 변질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해를 넘겨 전방위로 벌어지고 있는 적폐청산이 도(道)를 넘고 있지 않나 다시 한 번 살펴야 한다. 아직도 ‘우리만 깨끗하다’, ‘우리만 정의다’라는 진보의 해묵은 과오에 빠져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지금 맞이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시대는 국가간, 산업간 경계가 허물어진다. 다 먹거나, 다 먹히거나의 냉혹한 생존게임이다. 세계 기업 순위 톱10에 오른 미국 IT기업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전세계 유망 기업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중국은 얼마 전 막을 내린 CES(세계 최대 IT전시회)를 자신들의 독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딛고 일자리가 넘쳐나는 유래 없는 호황을 이뤄냈다. 우리도 성장율은 오르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와 핸드폰을 빼면 남는게 없다. 그마저도 중국의 무서운 추격에 덜미를 잡히기 일보직전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적 현실이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은 달콤한 신기루일 뿐이다. 이제 갈등을 멈추고 꿈 잃은 청년들이 다시 꿈을 꿀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야 한다. 세계최고의 교육열에도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이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로 가는 희망의 사다리를 내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과제다. 이것이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항쟁이었지만 지금은 책임자로서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극중 연희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라고 물었다. 쉽지 않지만 같이 노력하면 세상은 바뀐다. 그 선두에 386이 있다.

민병수/디지털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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