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간 교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한재동(71)씨가 세간에 알려진 건 퇴직 3년 뒤인 2007년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부터 민주시민감사패를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얼굴이 드러났다.

한 씨는 1987년 6월 항쟁의 계기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교도소 밖 세상으로 전한 ‘비둘기’였다.

또 요즘 난리가 난 영화 ‘1987’ 속 유해진씨가 연기한 한병용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에서 조경 일을 하던 그는 첫 만남에도 이미 수 차례의 인터뷰가 익숙한 듯 무심해보였다.

영화 이야기부터 꺼내려고 한 그를 만류하고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고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987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거 아니오?”라고 묻는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알아야 선생님이 왜 편지를 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가 들려준 그의 역사는 우리나라 민주화가 걸어온 적나라한 실체이기도 했다.

한 사내가 걸어온 길을 추적해보니 그는 1980년대 공직자 신분이면서 민주화의 중점에 선 비범한 인물이었다.

15년간 교정일을 하면서 그을러진 검은 피부에 짧은 머리카락은 단호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전라도 말씨에 빈틈없는 말투는 민주화를 열망했던 30년 전 젊은 그를 떠올리게 했다.

-교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인 1963년도에 우리나라에 필드하키가 처음 들어왔죠. 나는 필드하키 선수였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출전 한 번을 안시켜주더군요. 알고보니 광주 학교가 필드하키로 출전하고 우리 순천 학교는 배드민턴에 출전하기로 선생들끼리 입을 맞췄더만. 운동만 했으니 공부를 잘했겠습니까. 일찌감치 전역하고 교도관 시험을 봤어요.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시험을 봤는데 교정직이 붙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말인가요.

“1969년에 필기시험을 합격했는데 당시 집안 권유로 서울에서 일을 했어요. 몸이 안좋아서 쉬었는데 71년에 다시 시험에 붙더라고요. 교도관하라는 팔자인가 보다 하고 교도관으로 정착한 거죠.”

-교도관 생활은 어땠는가.

“1971년에 수원교도소로 첫 배정을 받았어요. 만날 졸자로 일을 하다보니까 감시를 하는 관망대, 좁은데서 일을 시키더군요. 군대에서도 이병일 때 일반 하사직에 지원해 근무를 했었습니다. 여기서도 막내로 힘든 일을 할 바엔 간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죠.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됐습니다. 근무시간에 교정직 행정학 책을 읽었다고 꼬투리를 잡아서 사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근무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내게 사표를 요구하길래 시말서와 함께 요구사항을 첨부해서 제출했습니다. 교정직 공무원들의 직원 처우가 열악하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랬더니 징계로 만장일치 파면을 내리더라고요. 사표를 강요받았지만 버티다가 대전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죠.”

-트집을 잡아 징계를 받았으니 순탄치 않았겠는데.

“대전에서 경주, 장흥, 서울구치소 등등 계속 돌았습니다. 높은 사람 말 안듣는 직원으로 찍혀서 하루종일 감시의 눈을 받고 살았습니다. 새벽 근무중에 잠깐 눈을 붙이면 졸았다고 징계받고. 이런 일이 허다했죠. 당시 어려움을 견뎌내는 데 책이 도움이 됐습니다. 같이 하숙하던 사람이 월간지 씨알의 소리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주더라고요. 그것을 읽으면서 민주 사회에 대한 눈을 떴다고나 할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폐간될때까지 7년을 봤는데 그 책을 보면서 제 생각이 많이 깨어났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생각하는 계기가 된 건가.

“책의 영향도 있고 1975년에 서울에 다시 올라왔는데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부터 양심수들을 많이 봤습니다. 당시 정부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양심적으로 성명을 발표한 사람들이 수감돼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76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문익환 목사, 김기하 시인 등이 들어왔는데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됐죠.”

-정의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볼 수 있는가요.

“책이나 수감자들을 보면서 이론적으로는 무장이 돼 있었어요. 그러다가 79년 3월 1일에 일이 터졌죠. 국경일날 무조건 군복을 입고 근무를 해야했는데 출근하던 직원이 교정에 들어와서 갈아입겠다고 항의했습니다. 이게 원인이 돼 간부가 직원을 때렸어요. 직원들이 병원에 모여서 소장에게 진정서를 썼습니다. 직원들 동의를 받았는데 200명 정도 사인을 했어요. 서울구치소 창설 이래 최초의 공무원 단체행동이었습니다. 당시 과장들이 술을 사가면서 진정을 취소해달라고 했는데 올바르지 못한 행동에 사과하라고 거부했어요. 그랬더니 전출명령을 내렸더라고요. 끝까지 포기안했던 직원 6명이 소장에게 따지고 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당신들은 부정행위를 저지르면서 우리는 정당한 일에 대해 말도 못하냐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위에서 반성을 합니까.

“아니죠. 나는 김천으로 쫓겨났어요. 한달쯤 됐나. 봉급탈때가 됐는데 봉급을 안주길래 연락해봤더니 서울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봉급받으러 올라왔더니 소장이 왜 여기로 왔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두시간을 이야기하는데 회전의자에 앉아서 대화도 섞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이틀 뒤에 검찰에서 연락이 와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업무방해에 상급자에게 대들었다는 게 이유인거에요. 소장이 고발을 했더라고요. 검찰에서 사표를 낼래 구속이 될래 하더라고요. 도저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들더라고요. 저는 그 해에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습니다. 민주주의가 오기를 희망하면서 데모 현장에도 많이 갔었어요. 절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성동구치소에 구속을 시키더군요. 다른 직원들은 사표를 내고 나갔는데 나는 버티니 구속을 시켰더라고요. 구속이 되니까 김천교도소에서 나를 징계하겠다고 자술서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자술서를 썼더니 파면을 시켰습니다. 한 달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파면이 돼서 순식간에 직장을 잃었죠.”

-복직을 위한 싸움이 시작된건가.

“소청심사를 청구해 승소했습니다. 그런데 김천교도소에서 다시 징계를 통해 나를 재파면하더라고요. 다시 소청 청구하려고 하는데 하필 박정희 전 대통령 10.26 사태가 발생해 온 나라가 비상사태가 됐어요. 법원에 가니 전부 군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심사들이 하는 말이 군인보다 엄해야할 교도관인 내가 잘못을 했다면서 소청심사를 기각 시키더라고요. 대법원까지 3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 힘든 싸움 끝에 김천소년교도소로 복직을 했습니다.”

-눈밖에 난 사람이 서울로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았을텐데요.

“예전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이 청백리상을 탈 만큼 강직한 분이었어요. 우리같은 사람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 좋아하면서도 윗선들이 싫어하는 옳은 소리는 너무 많이 한다고 하신 분이죠. 미운정, 고운정이 다 있었죠. 그 분이 영등포교도소 소장으로 진급해서 저도 그리 데려가달라고 했죠. 당시 결혼할 사람도 서울에 있고 지인들도 있어서 서울로 가야겠다 싶었거든요. 기다리다보니 84년 6월 30일에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때 영등포로 가게된 겁니다.”

-여기서 1987년도를 맞이한 건가.

“그렇죠. 1986년 5·3 인천 사태로 이부영씨가 수감됐습니다. 이부영씨는 나보다 다섯 위엔데 76년도에 서울구치소에서 만났던 분입니다. 인연이 되면서 자주 만났고 서울대 앞이나 중앙대 등등 데모현장에 같이 갔었습니다. 당시 교도관들이 5시에 업무가 끝나면 직원이발소에서 6시까지 대기하다가 퇴근을 했습니다. 이부영씨가 수용된 사동이 그 근처여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이부영씨와 이야기를 자주 나눴습니다. 1987년에 남양동 대공분실에서 학생을 조사하다고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이야기를 하게됐죠. 당시 고문 경찰들이 이부영씨 건너 건너방으로 수감이 됐어요. 이부영씨가 어느날 제게 “종이와 볼펜 좀 줘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도 모르게 근무용지 몇 장하고 내가 가진 볼펜을 줬습니다. 당시 안유 보안계장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구나 싶더라고요. 안유 계장이 수감된 경찰들에게 고문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거죠. 이부영씨가 전병용씨에게 메모를 전해주라고 해서 이튿날 전병용씨에게 전해줬고 그게 김정남씨한테 건네간 겁니다. 전병용씨는 내가 파면당한 서울구치소 사건 당시 사표를 내고 나간 동료 교도관이었습니다. 전병용씨도 인천 사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도망다닐때였죠. 쪽지를 전병용씨에게 건넸는데 이틀 뒤엔가 전병용씨도 구속이 됐습니다. 이부영씨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니 그 때부터 김정남씨에게 직접 전해주라고 하더라고요. 세 번 정도 전해줬습니다. 당시 이부영씨가 제게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이게 바깥으로 터지면 큰 국민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죠.”

-2004년 퇴직때까지도 이 내용은 비밀처럼 지켜졌는데.

“나는 정의사회를 위해서 해야할 일을 전한 것 뿐이고 민주주의 사회를 누구보다 꿈꾼 사람입니다. 쪽지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그 이면에 나같은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인거죠.”


-꿈이나 바라는게 있습니까.

“내 나이 70이오. 바라는게 있겠소. 물 흐르듯이 사는거에 만족하는거지.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의 본이 되고 따를 수 있도록 정의롭게 살아야겠죠. 그렇지만 젊은이들도 정의롭게 살려도 노력하고 진실이라고 하면 용감하게 해내려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진실을 알고 있더라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것도 악(惡)입니다. 알아도 행동으로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겠죠. 젊은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진기자/chj@joongboo.com

사진=윤상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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