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1552~1617) 생가는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817에 위치한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제일 먼저 거병하여 왜적을 무찔렀던 의병장이다. 생가는 의령군이 2005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조선중기 경상우도 지역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구조를 본떴다. 주변에는 곽재우장군 문화공원을 만들어 의병박물관과 의병체험장을 꾸며놓았다.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더욱이 의령군은 국회에 청원하여 2010년부터 매년 6월 1일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로 제정토록 하였다.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생가로 곧바로 가지 말고 마을 앞 현고수를 먼저 보기 바란다. 수령 52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곽재우가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모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을 산세를 보면 순하지만 기세 있게 생긴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들판은 넓고 평탄하며 그 가운데로 유곡천이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서출동류 하는 유곡천은 발원지가 멀어 수량이 풍부하다. 반면에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는 매우 좁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곳을 택할 때에는 처음에 지리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지리에서 첫째는 수구가 자물쇠로 잠근 듯 좁아야 하고, 둘째는 마을 안쪽에 탁 터진 들판이 있고, 셋째는 마을 뒷산이 수려하고 단정하며 아담해야 한다. 넷째는 토색으로 흙이 단단하고 밝아야 하며, 다섯째는 물이 모여들어 풍부해야 한다. 여섯째는 전후좌우로 보이는 산들이 밝고 깨끗해야 하며, 일곱 번째는 마을 외곽의 큰물들이 거슬러 흘러야 좋다고 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 세간마을이다.

현고수처럼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정자나무는 기능이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이 그 밑에서 놀거나 쉬는 정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풍수적으로는 바람과 물의 흐름을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 외부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올 때 이를 막아 완충시켜준다. 마을이 강한 바람을 맞을 때와 한번 완충된 부드러운 바람을 맞을 때와는 그 기운이 다르다. 장마철 유곡천이 범람할 경우는 물이 빠르게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또 외부로부터 마을을 차폐함으로써 외침을 막는 보호수 역할을 했다. 때문에 마을 앞 정자나무를 비보수(裨補樹)라고 하여 매우 귀하게 여긴다.

입구에서 마을이 길지라는 판단을 했으면 이제 좋은 집을 골라야 한다. 좋은 집은 맥의 끝자락에 있다. 구분이 어려울 때는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작은 개울이나 평탄한 지형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 산은 물을 건널 수 없고, 산이 멈추면 그 앞은 평탄하기 마련이다. 곽재우 생가는 남덕유산에서 먼 거리를 이어져 내려온 산맥의 끝자락에 있고 앞은 평탄하다. 뒤의 현무봉은 위엄이 있어 홍의장군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현무봉 중심맥이 가파르게 내려와 멎은 곳에 안채가 위치한다. 앞에 보이는 산들은 귀인봉, 투구봉, 깃대봉, 노적봉 등 다양하다. 모두 생가를 향해 있어 마치 의병들이 곽재우를 중심으로 기치창검을 높이 쳐들고 있는 듯하다.

곽재우는 현풍곽씨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호 집안 후손이다. 아버지는 곽월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까지 올랐다. 어머니는 이곳 세간리에서 누대에 걸쳐 부호로 살아온 진주강씨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곽재우는 이곳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곽재우가 3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아버지는 처가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부자가 되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의령의 최고 부자인 허씨 집안의 무남독녀에게 새장가를 갔다. 곽재우는 허씨 밑에서 자랐는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고, 곽재우 역시 의붓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곽재우는 10대에 산청의 남명 조식에게 수학했다. 16세 때 단성의 재력가인 상주김씨 집안에 장가들었다. 부인은 남명의 외손녀다. 이러한 이유로 곽재우는 재산이 많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그에게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 많던 재산을 의병활동에 모두 털어 넣은 것이다. 그의 이러한 기개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여기서 가까운 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한 백산 안희재 선생 생가가 있다. 시대만 다를 뿐 두 사람은 닮은꼴이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으니 두 사람의 기개는 이곳의 위엄 있는 산세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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