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우리는 미국 못지않게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 해 왔다. ‘한강의 기적’ 이란 단어를 체험한 세대들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기적 안에서 실제로 그렇게 된 사람들을 숱하게 보며 자라왔다. 당시 학교마다 교실 뒤편의 게시판에는 쭉 뻗은 경부고속도로부터 용광로의 시뻘건 쇳물이 흐르는 공장의 사진으로 도배됐다. 사실상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오늘자 신문들은 경제지를 중심으로 일제히 가정 형편이 열악한 이른바 ‘흙수저’ 학생들의 현실을 여과없이 그려냈다.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의 비중이 9년 새 대폭 하락했다는 기사다. 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이 출세도 어려울 것이고 결국은 부잣집 학생들보다 입신양명(立身揚名)까지의 시간이 더 걸리거나 아예 힘들 것 이란 다소 고단할 수 있는 얘기다.

그냥 어림잡아 하는 얘기가 아니다. 매번 이런 얘기가 나오면 단골로 등장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즉 OECD의 통계치라 믿기가 수월하다. 줄여 보자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위 25%인 한국 가정의 학생들 중 만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읽기·수학·과학 성취도를 점검하는 방식인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3등급 이상 상위권에 든 ‘학업 탄력적’ 학생의 비율이 70개 조사대상 국가 중 9위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점점 기록이 저조해져 간다는 얘기다. 지난 2012년 조사에서 우리는 54.9%로 2위를 기록해 세계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모든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취약계층 학생들이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로 아예 굳어진 대목이다.

짐작으로 그럴 것 같았고 못사니까 괜찮은 학원 보내기도 어렵고 노트북이나 필요한 뒷받침이 어려우니 당연히 형편 어려운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따라잡기가 쉽겠냐는 식의 가정은 있어왔다. 그럼에도 통계가 이렇게 되면서 얘기는 고착화 되는 듯 하다. 앞서 언급한 ‘학업 탄력적’ 학생 비율이라는 것이 가장 높은 곳은 홍콩이고 싱가포르와 에스토니아, 일본, 캐나다와 핀란드, 대만이 뒤를 이었다면 고개가 금새 끄떡여진다. 주목할 대목은 이렇게 앞서 나간 국가들 말고 주요 경제국들 중 독일이 12위로 우리만 못하고 영국도 무려 19위를 기록한 것이다. 더구나 중국과 미국은 22위와 31위를 기록했다면 이런 통계가 과연 유효한 것인지 까지 의심받을 수 있다.

대답은 선명하다. 이 비율이 상승한 국가들이 평균 학업성취 수준을 높이고 학교 교육의 질을 개선하거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능력을 설명하는 정도를 감소시켜 결과적으로 형평성을 높이는 성과를 냈다는 이유다. 이러한 얘기는 우리가 그동안 당연시 한 학생들의 정기적 등교, 혹은 뒤따르는 교실의 보수적인 분위기, 학교 내 과외활동 등이 학업 탄력성에 긍정적 연관성을 보여 그나마 학업 탄력적 학생 비율을 10위 안에 유지하고 있다는 우쭐함도 곁들일 수 있다. 다만 학생 수당 컴퓨터 비율이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대목은 교육당국이나 관계자들이 유의해야 할 점이다. 여기에 정부가 저소득층 학생들도 목적이 뚜렷한 과외활동을 확충하고 학교가 더 포용력 있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사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이 슬로건으로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이 오직 학력과 학벌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평가된 탓이 크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경제발전이 이러한 토양 안에서 이뤄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얘기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우리의 경제가 고성장의 시대를 접으면서다. 개천에서 난 어려웠던 용들은 기억을 잊으면서 자신들만의 신화를 다시 그려가기 시작했고 결혼도 밥도 끼리끼리 심지어 노는 것도 그들만의 장이 돼 가고 있다. 소위 신귀족주의라는 말을 우리에게 만들어 준지도 모른다. 이미 이런 일들로 인해 우리는 사회적 위기와 어지러움증을 호소하고 있다. 한 예로 비정규직의 철폐다. 정규직 노동자와의 과도한 임금 격차가 옳지 못해 정규직 노동자 조차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밥그릇이 그들로 인해 줄어든다고 하자 반발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이 거창하다 해도 ‘흙수저’가 ‘금수저’로 바뀔 희망이 없다면 교육에 목 맬 학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문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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