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즈음의 일이다. 마케팅 회사의 인턴사원이었던 김 모 (26) 씨는 매주 금요일마다 직장상사와 저녁을 먹었다. 업무 능력이 부족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직장상사는 "네 목숨(일자리)은 내가 쥐고 있다"며 자신에게 잘 보일 것을 은연중에 압박했다. 틈만 나면 손금을 봐준다며 손을 만지고, 은근슬쩍 허리를 감싸기도 했다. 스킨십이 점점 심해지자 김 모 씨는 5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부장이라는 위치에서 아랫사람, 특히 나 같은 인턴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바보같이 항의도 못 하고 그만둔 게 후회스럽다"고 했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의혹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8년 전 발생한 성추행 사건을 지난달 31일 공론화시킨 서지현 검사는 "이것은 저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서 검사는 "제가 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는지, 혼자만의 목소리를 냈을 때 왜 조직이 귀 기울일 수 없었는지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해당 의혹이 제기되자 사회 전반에는 "나도 직속상사로부터 성희롱, 성추행을 당했다"는 의견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성범죄는 때와 장소를 가려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조직 내 상급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갑질 성범죄'는 잊을만하면 반복된다. '갑'의 위치에서 성범죄를 하는 이들의 심리,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봤다.

◇ 상사가 부하직원에 성범죄…"쉬쉬하는 경우 많아"

경찰청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신보라(자유한국당)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조직 내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2014년 449건, 2016년 54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7년에는 8월까지 370건이 발생했다.


여성가족부의 '2015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직장 내 성희롱 행위자는 상급자(39.8%)가 가장 높게 나타났고 행위자의 성별은 대부분 남성(88%)이었다. 또 피해자는 정규직(6.2%)보다 비정규직(8.4%)이 많았고 피해 연령은 20대(7.7%), 30대(7.5%) 순이었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성범죄는 여전히 쉬쉬하고 넘기는 분위기가 많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성범죄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성희롱 실태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 연구'에서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54%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고 말했다.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로 응답자의 45.6%가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고 응답했다.

조사를 진행한 윤정숙 한국정책연구원은 "이 같은 결과를 미루어봤을 때 성희롱은 '신고해도 별 달라질 게 없거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피해자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너도 좋아하잖아" 갑의 위치에서 상대방 지배하려는 욕구 강해

권력형 성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는 심리학적으로 크게 2가지로 분석된다. 바로 '지배욕적 관점'과 '인지적 왜곡'이 원인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선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니콜라스 그로스와 진 번바 움 박사가 1979년 발표한 '강간한 남자들: 가해자의 심리(Men Who Rape: The Psychology of the offender)'를 살펴보면, 권력지향형 성범죄자는 세상을 지배·통제하고 싶은 잠재적 욕구를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 힘과 남성다움, 성적인 매력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충동적이며 기회주의적이고 상대방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는 것을 즐긴다는 분석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사는 "권력형 성범죄의 특징은 육체적 지배보다 정신적 지배를 통해 성적 희열을 충족하는 경향이 있다"며 "자신이 하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대해 피해자가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지배적 우월감이 성적 만족으로 전이된다"고 설명했다.

승 박사는 "특히 강간과 같은 강제적 성관계는 곧 신고로 이어져 자신의 권력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며 "이로 인해 보다 덜 위험하지만,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성희롱, 성추행 등을 일삼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권력형 성범죄자가 가진 '인지적 왜곡'도 문제다. 단적인 예로 피해자가 처음에는 반항하지만 일단 제압당하고 나면 성범죄 상황을 즐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갑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싫다고는 해도 사실은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성범죄 원인 및 발생환경분석을 통한 성범죄자 효율적 관리방안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인지적 왜곡은 주로 우월적인 위치에서 상대방의 인권을 소홀히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윤정숙 연구원은 "이 같은 왜곡된 태도는 성범죄자가 자신의 행동을 무마하거나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며 "만약 피해자가 성폭력에 문제를 제기하면 '별것도 아닌 일로 너무 유난을 떤다'거나 '과잉반응이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직장 내 '평등한 환경', 가해자에 사회적 공포감 줘야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인해 성희롱, 성추행을 일삼는 가해자를 철저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2조에 따라 직장 내 성희롱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하지만 성희롱은 형사상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내려질 수 있는 처분은 내부 징계나 과태료가 전부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자체 처벌로 인해 피해자가 해고되지 않고 가해자와 계속 같이 근무하게 됨으로써 피해자의 고용환경이 악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오히려 부당한 조치를 당하는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문제 제기로 인한 불이익 조치를 당했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57%에 달했다. 불이익 조치에는 '신분상실에 해당하는 신분상의 불이익'과 '정신적·신체적 손상'이 각각 53.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해외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성희롱 가해자에게 형사 처벌이 가능해 징역이나 벌금이 내려질 수 있다. 미국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직장 내 성희롱 사건 가해자뿐만 아니라 기업에도 벌금을 청구해 책임을 묻고 있다.

학계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성추행을 근절하기 위해 근로 환경에 있어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평등한 환경을 조성하고, 가해자에 사회적인 공포감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조직의 위계질서가 강하면 강할수록 상사가 부하 직원에 '왕'처럼 군림하려는 특징이 있다"며 "위계질서를 완화하고, 상명하복을 없애고, 모든 직원이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때 '갑의 성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가해자가 성희롱과 성추행을 저질렀을 때 더는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박혀야 하는데, 대개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 버리는 사회적 분위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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