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오죽헌은 강릉시 죽헌동 201에 위치한다. 조선 전기의 건물로 세종 때의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의 둘째아들 최응현(1428~1507)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최응현은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중종 대에 걸쳐 이조참의, 동부승지, 충청도감찰사, 대사헌, 형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한 인물이다. 80세까지 장수한 그는 부인 영양남씨 사이에 5남6녀를 두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할 때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당시는 사회풍습이 자녀균등 상속이 원칙이었다. 제사도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지냈다.

이러한 풍습이 사라진 것은 조선 후기부터다. 상속이 장남 우대로 변화되었다. 대신 맏아들은 부모를 모시고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딸들은 재산상속에서 배제되면서 조상제사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선 전기 때는 딸이나 외손자에게 상속되었다. 재산을 물려받은 외손자는 외가의 제사를 맡았는데 이를 외손봉사(外孫奉祀)라고 한다. 외손봉사의 대표적인 집이 오죽헌이다.

최응현은 오죽헌을 용인이씨 이사온과 혼인한 둘째딸에게 물려주었다. 이사온과 강릉최씨는 딸 하나만 두었다. 무남독녀로 자란 용인이씨는 평산신씨 신명화와 결혼하여 아들 없이 딸만 5명 낳았다. 딸들은 각각 장인우(1녀), 이원수(2녀), 홍호(3녀), 권화(4녀), 이주남(5녀)과 혼인하였다. 둘째 딸이 신사임당(1504~1551)이다, 그녀는 미관말직으로 강릉에 근무하던 덕수이씨 이원수와 혼인하여 4남3녀를 두었다. 이중 셋째 아들이 몽룡실에서 태어난 율곡 이이(1536~1584)다.

조선 전기는 남자가 혼례를 치르면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가는 풍속이 있었다. 이원수도 신사임당과 결혼 후 19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였다. 서울에 와서도 처가의 서울 살림집인 수진방에서 머물렀다. 이러한 배경으로 율곡은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뜨자 율곡은 외할머니를 보기 위해 자주 강릉을 오갔다. 외할머니가 병석에 있을 때는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가는 바람에 탄핵을 받기도 했다. 율곡의 효도 덕분인지 용인이씨는 90세까지 살았다.

오죽헌 율곡기념관에는 용인이씨가 생전에 재산을 다섯 딸들에게 나누어준 「이씨분재기」가 전시되어 있다. 용인이씨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노비, 가옥 등을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다만 외손 율곡에게는 제사를 받들라며 서울 수진방 집과 전답을 상속하였다. 4녀 권화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돌보는 명목으로 오죽헌 집과 전답을 상속하였다. 이때부터 오죽헌과 그 일대는 안동권씨 집성촌이 되었다. 오죽헌이란 택호는 권처균이 이 집을 물려받아 살면서 주변에 오죽이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1974년까지 약 400년 동안 안동권씨 문중에서 관리해왔다. 오죽헌이 율곡기념관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다.

오죽헌을 비롯한 강릉지역 대부분 땅의 태조산은 백두대간 곤신봉(1131m)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이 대궁산(1008.3m)과 명주왕릉이 있는 멍어재까지 높은 산줄기로 이어진다. 멍어재부터는 산의 높이가 낮아지며 순한 구릉으로 변한다. 오죽헌의 풍수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집 뒤로 가보아야 한다. 곤신봉에서 집까지 연결되는 용을 보면 오죽헌이 왜 명당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오죽헌 안채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안산은 미인의 눈썹처럼 생긴 아미산이다. 옛 풍수서들은 아미산 있으면 여자가 부귀 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도움으로 부와 귀를 얻는다고 하였다.

오죽헌 지형은 좌청룡보다 우백호가 훨씬 발달했다. 청룡은 주차장 입구 쪽의 능선으로 4겹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청룡을 제외하고는 오죽헌을 제대로 감싸주지 못한다. 이에 비해 백호는 능선들이 겹겹으로 감싸며 앞의 조산을 이룬다. 백호가 발달한 터에서는 남자보다 여자들의 기가 세다고 하였다. 오죽헌이 바로 그런 자리다. 안산이 가까이 있으면 높은 곳에 터를 정하라고 했다. 오죽헌은 주차장 땅과 비교하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최응현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 풍수를 보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풍수는 만대영화지지를 추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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