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흔히 이방인이라 부른다. 20세기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현실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대중속의 고독이라는 언어도 이와 유사한 형태라 볼 수 있다. 필자가 제주도에서 육지발령을 앞두고 꼭 만나고 싶은 이들이 있었다. 이방인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청소년들. 그것도 빵을 훔치는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다가 적발되어 소년원과 교도소까지 가게 된 아이들이다. 이들에게 하나같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십중팔구 깨진 가정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내고 부모들의 이혼, 아픈 상처들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이다. 제주도에는 타도에 비해서 생활수준이 높다. 생활력이 높은 여성들의 덕택이다. 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과 각종 볼거리가 많은 관광지라는 특수성 있는 도시다. 아이러니하게도 광역단체 중 이혼율이 제일 높다는 불명예가 따라 다닌다. 물질이 아무리 있다한 들 가정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진다는 것은 아이들을 통해서 증명이 된 셈이다. 같이 식사와 차를 나누면서 하나같이 건강하게 자랐더라면 자기의 재능들을 얼마든지 꽃피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었다. 앞으로의 희망사항을 물었더니 대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친구들도 있고, 음악과 엔지니어를 전공하고 싶은 친구도 있었다. 목적의식이 뚜렷했다. 잠시 방황기간은 있었지만 자기의 진로를 정했다는 것은 퍽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멘토 되는 쉼터 센터장님의 따뜻한 보살핌 하에 능력대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자기 자식같이 대했다. 거기에는 훈계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다. 성경 잠언에도 ‘매를 때리지 않는 것은 내 자식을 미워하기 때문 이다“ 라는 말씀이 있지만, 적절한 훈계는 자식들의 방향키 역할을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아이들을 보면서 예전에 K중사의 얘기가 생각난다. 휴가 차 나왔는데, 가정이 없어 갈 데가 없는 그는 거리에서 배회하게 된다. 우연히 단란한 가족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걸어가는 모습을 본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갖고 있던 총으로 온 가족을 몰살하는 참상이 발생되었다. 나중에 조사관이 묻기를 “ 왜 그렇게 했느냐”고 했을 때 한 번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는 그는 “그 때 정신이 홱 돌았다“고 실토했다. 같은 내무반에 있던 동료들도 고아라고 차갑게만 대했지 인정 있게 대하지를 못했다. 한 번만이라도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사형수로서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시신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을 하고, 종국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런 암울한 세태에 대해 물질적 진보가 인간불행의 원인으로 파악한 루소의 예견은 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일전에 수원에 소재한 복지관 주방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배식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됐다. 몇몇 할머니들이 2인분 정도 분량을 식판에 주섬주섬 담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하도 궁금해서 조리장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이러했다. “그 할머니들은 아침을 먹지 못하고 여기 와서 두 끼를 해결 합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그늘진 곳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끼니보다 더 힘든 게 아마도 고독이라는 병이 아닐까. 찾아오는 이 없는 고독한 쪽방촌의 엄동설한은 이 보다 힘든 겨울나기가 없을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연상시킨다. 한 번씩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이방인과 같은 이웃이 많음을 보게 된다. 이즈음 우리는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되뇌어 보면 어떨까? 우분투란,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을 가진 아프리카 말이다.

안승국 한국면세점협회 실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