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제일의 고택으로 꼽히는 선교장(船橋莊)은 강릉시 운정동 431에 위치한다. 우리나라 민가주택 가운데 최초로 중요민속자료로 선정된 국가지정문화재다. 집 앞에는 평탄한 논이 펼쳐져 있는데 이전에는 경포호수가 이곳까지 이어졌다. 경작지로 매립하기 이전에는 배다리를 놓아 다녔는데 선교는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다. 장은 주변의 광활한 논밭이 장원 같다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전주이씨 효령대군 11대손 무경 이내번(1703~1781)이다. 그는 원래 충북 음성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모친인 안동권씨와 함께 외가인 강릉으로 이사 왔다. 처음은 저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점차 재산이 늘었다.

살림이 늘자 이내번은 보다 넓은 집터가 필요했다. 그는 좋은 집터를 찾아 다녔으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족제비가 나타나 따라오라는 듯 표정을 지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알고자 따라가 보았다. 가는 도중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 합류하더니 나중엔 한 떼를 이루었다. 얼마를 갔을까. 소나무가 울창한 야산자락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족제비 무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인 이내번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뒤쪽에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이었다.


이내번은 맥을 찾아 멈춘 곳에 집터를 정하고 새집을 지어 이사하였다. 그 후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농토는 확장되었다. 아들 이시춘과 손자 이후, 증손 이근우로 이어지면서 대관령 동쪽 관동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만석꾼이 되었다. 선교장 주인들은 대대로 인심이 넉넉하여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매표소 입구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야트막하지만 둥글게 생긴 봉우리가 보인다. 풍수에서 말하는 노적봉이다. 집 앞에 있는 산을 안산이라 하고, 안산이 노적봉이면 전답이 많은 부자가 된다는 것이 풍수지리 발복론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노적봉이 보이는 곳은 부잣집이 많았다. 산은 보는 위치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 보인다. 같은 산이라도 선교장에서 보면 노적봉처럼 생겼지만 다른 곳에서 보면 다른 모양이다. 이처럼 안산의 모양을 보고 길지를 찾는 것을 안산심혈법이라고 한다.

입구 가까운 연못가에 활래정(活來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내번의 손자 이후가 순조 16년(1816) 건립한 것을 증손 이근우가 중건한 것이다. 청룡 끝자락에 ㄱ자형으로 있으며, 건물 반은 땅 위에 있고 반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쳐놓은 누(樓)형식이다. 활래는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무엇인가.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 나오기 때문이지.”에서 따온 것이다. 선교장의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 앞에는 우물이 있는데 여기서 솟은 물이 활래정 연못으로 흘러간다. 풍수에서는 집 앞에 있는 물을 진응수라고 하여 대혈의 증거로 삼는다. 용맥을 양변에서 보호하며 따라온 땅속 원진수가 집 뒤에서는 분수하고 앞에서는 합수한다. 합수처에 샘물이나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혈은 물의 상분하합(上分下合)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있는데 안채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

안채 뒤로 가보면 맥이 안방으로 이어진 것이 보인다. 그러므로 정혈은 안방인 것이다. 이 맥은 백두대간 곤신봉(1131m)에서 비롯된다. 대궁산(1008.3m)을 거친 산줄기는 급하게 평지로 내려와 낮고 순한 태장봉(110m)을 세운다. 여기서 산줄기는 경포천을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남쪽 줄기에는 오죽헌 북쪽 줄기에는 선교장이 위치한다. 선교장은 전체적으로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남서향을 하고 있다. 안채를 지을 때 맥을 등지다보니 정남향을 하지 않았다. 이로 보아 선교장은 풍수적인 조건을 우선하였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풍수를 이용할 줄 알아야한다는 의미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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