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길이 아고라로 가는 길인가. 아고라에는 법원과 평의회 그리고 공공토론장들이 있다. 하지만 의사결정, 토론이나 법률결정 같은 것에는 별 볼거리나 반향도 없다. 사법관에 대한 귀족 정치결사들의 술책, 집회, 연회 ··· 흥겨운 파티만 있다. 거기에 끼어들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광장, agora)을 두고 플라톤(Plato)이 비꼬아 한 말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토론광장을 ‘사이버 아고라(cyberagora)’라고 지칭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비판처럼 아고라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숙된 민주적 토론광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선동가와 장사꾼 심지어 사기꾼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매우 소란스럽고 혼란한 공간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목소리 큰 사람’ 아니면 ‘언변이 좋은 사람’이 주도하는 즉, 선동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 후반 ‘정보화사회’ 도래를 예견했던 많은 학자들이 정보기술을 통한 ‘전자민주주의(electronic democracy)’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담론들로 이성과 합리성이 아닌 감성과 집단정서가 주도하는 ‘우중정치’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21세기 네트워크가 더욱 고도화되면서 정치는 물론이고 모든 사회 현상이 급속히 인터넷으로 이동하고 있다. 때문에 인터넷 공간에서의 집단적 토론이나 판단이 긍정적인 사회변화와 발전을 추동하고 있다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나 ‘스마트 몹(smart mob)’ 같은 긍정적인 기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이나 ‘상호감시 효과’ 등으로 여론 획일화와 양극화 현상도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또 집단적 악성 댓글에 의한 인격침해도 심각한 상황이다.

최근 자주 화제가 되고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이 같은 인터넷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국민들이 국가 최고 권력자(혹은 권력기관)에게 직접 민원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과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부 감성적 청원들이 집단 정서 형태로 표출되면서 부작용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판사를 해임하라든지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을 반대한 정치인을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에서 사퇴시켜야한다는 등의 청원들이 그런 경우다. 더구나 이 청원들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아 그 병폐가 더욱 커질 수 있다. 특히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기간 중에 있었던 특정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해달라는 청원은 단 이틀 만에 50만 이상의 청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청원들에 대해 정서적으로 일부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가 이런 감성적 청원들을 부추기는 공간을 개설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 혹은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감성에 의존하는 우중정치를 더 나아가 사회·정치적 갈등을 정부가 직접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 청원들이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엄연히 삼권이 분리되어 있고 각각의 사회영역들의 고유한 역할과 권한을 인정해야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가 이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도 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 청와대가 청원과 관련해 권한을 넘어선 적은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최고 권력자가 모든 것은 해결해주기 바라는 이 같은 국민들의 정서가 우중정치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우중정치는 결국 인기영합주의(populism) 정치를 거쳐 궁극적으로 대중 영합적 권위주의 정치체제로 가게 된다.

구성원의 정치적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정치제도도 지도자의 역할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군주제나 과두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투키티데스(Thucydides)는 아테네를 이상적인 민주국가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페리클레스(Perikles)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형태는 민주정치지만 실제로는 혼자 통치했다.”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말이다.

황근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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