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명목으로 받는 돈은 한 달에 70만원이었다. 매일 9시간 이상을 연구실에서 보냈고, 남는 시간은 과외나 번역 등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교직원들은 '집이 살 만하니까 대학원 다니는 거 아니냐'는 비아냥과 함께 반말과 폭언을 수시로 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 소재의 한 명문 대학교에서 서양 철학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김 모(39) 씨는 당시 처우가 비정규직보다도 못했다고 기억한다. 김 씨는 "업무량은 일반 직장인 이상으로 많았지만 4대 보험이나 적정 임금, 인간적인 대우 등의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며 "만일 우리가 노동자가 아닌 학생이라면 일을 시키지 말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학은 고급 인력을 양성한다는 허울을 쓴 채 대학원생을 착취하고 있다"

대학원생 노동조합(대학원생 노조)이 최근 열린 노조 출범식에서 한 말이다. 노조 측이 개선이 시급한 점으로 꼽은 것은 두 가지다. 인권 침해, 그리고 저임금 체계다.

각종 조사에 따르면 대학원생 대다수는 기본 생활 유지도 하기 힘든 금액을 받으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성폭력이나 부당한 업무 지시 등에 무방비로 노출됐지만 마땅히 신고할 곳도 없는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철저한 갑을 관계 시스템의 개선과 근로 조건의 개선만이 이를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제언한다.


◇ 성추행에 부당한 업무지시까지

"여학생이 석사 디펜스 자리(논문 심사 과정 중 발표 질의 응답을 뜻함)에 정장을 입고 오자 교수님이 '너 그렇게 입으니까 도우미 같다'고 발언했어요. 남학생인 제가 들어도 불쾌할 정도였어요"

이공계열 석사 과정 중인 A(27) 씨가 대학원생 연구환경실태 보고서를 통해 털어놓은 말이다. 이밖에도 "여자를 공부시킨 경험이 별로 없다는 성 차별적 발언을 자주 들었다", "술자리에서 여학생의 외모로 등급을 매긴 후 놀려서 모욕감을 받았다" 등의 피해 사례도 접수됐다.

이처럼 대학원생이 겪는 부당한 처우 경험 중 하나가 바로 성추행이나 성폭력이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원생 5명 중 1명은 성별이나 신체, 외모 등에 대해 조롱이나 모욕적인 비유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회식 자리나 논문 지도, 프로젝트 수행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이도 4.8%에 달했다. 특히 부당한 처우에 대한 경험은 여성이 52%로 남성(41%)보다 11%포인트 많았다.

모욕감을 느낄 만한 언어적 폭력은 물론, 구타를 당했다고 답한 비율은 22.8%를 차지했다.

부당한 일을 강요받은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연구 시간 외에 부당한 사생활 침해를 받았다고 답한 대학원생은 18.3%, 연구와 관계없는 일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고 답한 대학원생은 12.9%에 달했다. B(35) 씨는 자연계열 석사 과정 중에 "(지도교수가) 자녀의 과외를 무료로 시킨 경우도 있었고, 자신이 이사하는데 대학원생들을 시켜 이삿짐을 나르도록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노력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자신이 상당 부분 기여한 연구물에 공저자로 등록될 권리를 침해받은 적이 있다고 답한 이는 5.8%였다. 대학원생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프로젝트에 타인을 공저자로 올리라고 강요받은 적이 있다고 답한 대학원생은 7.2%로 나타났다.

예체능 계열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C(33·여) 씨는 "늘 그래왔던 분위기 속에서 인권 침해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 기초 생활 이어가기도 힘든 박봉

인권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처우다.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2015년 발표한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제도 개선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기초 생활 및 등록금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한 대학원생은 30%를 차지했다.

특히 박사 과정의 경우, 7.2%가 기초 생활조차 어렵다고 답했고, 15.8%는 등록금 납부도 힘들다고 답했다. 또 박사 과정 대학원생 중 38.5%가 미래를 위한 준비가 어렵다고 말했다.

학업에 지장은 없지만 여가 생활이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이도 절반이 넘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 중단을 고민한 경험이 있는 대학원생도 35.5%를 차지했다.

당장의 생활조차 꾸려가기 힘든 건 손에 쥐는 돈이 적기 때문이다. 처우는 최저임금에도 한참 미치지 못했다. 월 임금이 60만~90만원 수준이라고 답한 대학원생은 23.0%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어 30만~50만원 미만이 22.9%, 30만원 미만이 18.1%로 뒤를 이었다.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고 답한 이도 3.9%나 됐다.

반면, 근로 시간은 일반 노동자 수준 이상이다. 대학원생 4명 중 1명은 실제 월간 근로 시간이 160시간 이상이라고 답했다. 이는 업무 투입 전 명시한 조건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근무 전 근로 시간에 대해 공지조차 받지 못한 대학원생은 58.9%에 달했고, 대부분 월 60시간 미만 일한다고 명시했다.

'돈' 앞에서 대학원생은 가장 크게 좌절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대학원 재학 중 겪는 어려움 중 '경제적 부분'이 56.5%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학업 수행 어려움(55.4%)이나 진로 고민(44.4%)보다도 많다.

◇ 하소연할 길도 없어

더 큰 문제는 부당한 처우를 겪어도 하소연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서울대 인권센터에 따르면 부당한 일을 겪어도 제대로 대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학원생 5명 중 1명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반면에 직접 문제제기를 한 경우는 1.8%, 제도적으로 대응한 경우는 0.7%에 불과했다.

대통력 직속 청년위원회 조사에서도 대학원생의 65.3%는 "그냥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소극적인 대처의 원인은 두려움과 포기다. 절반 가량이 학점이나 졸업 등에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서 참았다고 답했고, 43.8%는 해결되지 않을 거 같아서 포기했다고 밝혔다.

신정욱 대학원생 노조 사무국장은 "교수가 대학원생의 인사권이나 논문 심사권 등 많은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늘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게 사실"이라며 "만일 부당함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옮기더라도 학계에서 낙인이 찍혀 참는 게 유일한 대안이다"라고 말했다.


◇ 대학원생, 노동권 개선 방법은

전문가들은 대학원생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이용우 변호사는 "대학원생 대부분은 교육뿐만 아니라 노동까지 병행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부정하고 단순한 학생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첫걸음은 근로 계약서 작성"이라며 "교육부와 고용노동부 등이 함께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을 준수하도록 전국 대학에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근로 계약서를 쓴 대학원생은 28.3%에 불과했다. 구두로만 들었다는 답한 이는 40.4%로 가장 많았고, 듣지조차 못했다고 답한 이도 29.4%를 차지했다.

그는 "대학원생도 최저임금, 휴게 시간 보장, 퇴직금, 산재 등 최소한의 노동자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한다"며 "지난해 동국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이미 노동자로 인정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정욱 대학원생 노조 사무국장은 "미국은 2014년에 (사립) 대학원생의 노조설립권을 인정했다”며 "노조 설립은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대학원생 중 절반 이상은 "자신이 학문 연구와 근로를 동시에 수행하는 학생 근로자로 인식한다"고 답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노조 설립 자체는 축하할 일이지만, 대학원 특성상 거쳐 가는 조직이고 오랫동안 몸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며 "지속성 면에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 "대학원생 조교 노동권 보장을"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2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한국대학원 총학생회 연합회가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교육부가 대학원생 조교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 연구원은 "(여러 대학이 모인) 연합 조직이고 산발적이기 때문에 교섭력 확보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교섭 대상도 교수협의회인지, 해당 교수 개인인지, 학교 측인지, 총장인지도 애매하지 않느냐"며 이 부분에 대한 개선을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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