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눈부셔 창문을 여니, 피부에 와 닿는 바람결이 따습다. 참에, ‘신여성 도착하다’라는 이색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덕수궁을 찾았다. 꽃피는 봄날, 고궁산책도 할 겸 찬찬히 보려 미뤄두었던 것이었으나 혹여, 잊은 채 3월이 지나가 버릴세라 더는 기다리지 못하였다. 도심 속 고궁엔 아직 꽃이 피진 않았으나 꽃무늬 한복 곱게 차려입은 한 무리 외국인 관광객들이 중화전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고, 뜰 안 몇 그루 굵은 등나무 주위엔 너덧 명의 정원사들이 새순 맞이 가지치기를 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이 땅에서 ‘신여성’이란 용어는 191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1930년대 말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수동적 삶에서 벗어나 신식 교육과 신문명의 세례를 받은 이들 신여성들은 사회적 선망을 받기도 했지만, 전통사회로 부터의 부정적인 시각 또한 엄연히 존재하여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시회를 통해 만난 신여성들은 참으로 대단한 여걸들이었다. 거기엔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 김명순과 1930년대 뉴욕 공연 후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무용가 최승희,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 사회주의 운동가 주세죽, 그리고 화가이자 문학가였던 나혜석 등 많은 시대적인 천재들이 있었다. 적잖은 신여성들이 특정분야의 개척자라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지만 특별히 오마쥬 하여 무대에 올려놓은 이 다섯 신여성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이었을까? 모두가 하나같이 불행한 말년과 최후를 맞았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유독 눈길이 간 이는 구한말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이다. 수원 출신으로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아직 직업의 분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모더니티 초기의 유럽에서처럼 일종의 르네상스적 작업을 했다. 즉 대부분의 신여성이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나혜석은 서양화가로서의 활동 외에 신문과 잡지들을 통해 엄청난 양의 선각적 시론과 시, 소설, 생활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500점이 넘었다던 그녀의 미술작품은 불행히도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30여 점만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남아 전해오는 그녀의 문필 자료들은 그 양이 방대하다. 더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의가 당시 조선 사회의 문화적 개혁 운동을 지향하고 전통적 가부장적 사회 관습에 맞서면서 조선의 여권(女權)과 그 개선의 필요를 줄기차게 역설하고 있다. 진실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용기 있는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후, 1934년 잡지 「삼천리」에 게재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혼 고백서’의 일부를 한 번 들여다보자.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중략) 여자도 사람이외다! 아내와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중략)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여성은 남성의 노리개가 아니라 온전한 자체’ 임을 천명한 이 사자후(獅子吼)를 84 년이 지난 지금, 소위 권력형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오늘에 대비해도 달라질 본질이 별로 없을 듯하다. 여성은 남성의 도구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 자체임을 천명하고 사랑과 예술은 삼키고, 모순과 굴욕은 토해낸 근대조선의 이 위대한 사상적 혁명가의 삶을 어설프게나마 더듬고 돌아서면서 오늘 이 사회가 겪고 있는 몸살을 단순한 남녀의 문제로, 혹은 권력의 문제로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 년 전 “여자도 남자와 같은 인간이다”라고 외쳤던 나혜석의 외침처럼 서로 평등한 인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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