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년 8월 신라의 군사 요충지인 대야성(현재의 경상남도 합천지역)이 함락되었다. 대야성은 신라 건국 이래 백제의 수많은 공격에도 함락된 적이 없었던 철옹성이었다. 신라의 조정에서는 백제와의 서쪽 접경지역에 있었던 대야성에 강력한 군사력을 주둔하게 하여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인 대야성은 백제군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성만 백제군에 의해 함락된 것이 아니라 성주인 김품석과 그의 아내인 고타소가 백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고타소는 신라의 국왕인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딸이었고, 김품석은 그의 남편이었으니 이들의 죽음으로 신라 왕실은 비통에 빠졌다. 아마도 김춘추의 슬픔과 분노는 일생 중 가장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의 죽음과 대야성의 함락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야성주 김품석의 한 여인에 대한 겁탈(劫奪)로 시작되었다.

김춘추는 화랑 출신인 자신의 사위를 신라에서 가장 위험지역인 최전선 국경 대야성으로 보냈다. 대야성주로 임명된 김품석은 공주인 자신의 아내 고타소를 서라벌에 두지 않고 함께 대야성으로 갔다. 대야성이 도착한 김품석은 아내인 고타소를 외면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는 한 여인에게 정신을 팔았다. 대야성 사지(舍知)의 벼슬을 하고 있는 검일의 아내가 바로 그 여인이었다. 성내의 잡다한 행정을 하는 사지란 직책은 신라의 17개의 관직 등급 중 13번째 해당하는 하위 관직이었다. 검일의 아내를 탐하기 시작한 김품석은 대야성주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검일에게서 아내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검일은 아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국왕의 사위이자 17관직 등급 중 2번째인 이찬의 벼슬을 한 대야성주를 감당할 수 없었다. 김품석은 마침내 검일의 아내를 겁탈하고, 검일에게 아내를 자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아내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결국 김품석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검일은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아마도 김품석이 검일을 아내에게 자신에게 몸을 바치지 않으면 검일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힘없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김품석에게 빼앗긴 검일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의자왕이 백제의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의자왕은 영특하고 담력이 컸다. 의자왕은 백제의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의자왕은 642년 여름에 장군 윤충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백제군의 공격 소식을 들은 검일은 이때를 틈타 자신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김품석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국가인 신라를 배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몰래 백제의 장군 윤충과 밀통을 하였다. 검일은 자신이 대야성의 중요 창고에 불을 질러 내부를 혼란하게 하여 신라군이 사기를 잃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창고에 불을 질러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비록 화랑이었지만 무능하고 여인만 밝힌 김품석은 백제와의 전투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백제군에 항복할 생각을 하였다.

김품석은 보좌관인 서천으로 하여금 항복하라고 하였는데, 이때 화랑 죽죽과 용석이 만류했다. 죽죽과 용석은 대야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형에 익숙하여 비록 초반에 백제군의 위세에 밀리기는 하였지만 최선을 다하면 성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무능한 김품석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항복을 하면 백제군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장군 윤충은 그의 기대와 달리 성문을 열고 나오는 신라군을 죽이고, 항복한 김품석과 그의 아내인 신라의 공주 고타소, 두 사람의 목을 베어 백제의 수도 사비로 보냈다. 신라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었다. 윤충이 김품석을 죽이고 목까지 베게 한 것은 대야성을 함락하게 해준 검일의 요구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남의 아내를 겁탈하고 빼앗은 김품석의 잘못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고, 신라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마저 빼앗기게 한 것이다. 잘못된 색욕과 겁탈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는 지 김품석을 통해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을 겁박하고 성폭행을 시도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패망하고 말 것이다. 이 중요한 역사의 교훈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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