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 긴 겨울동안 찬바람에 시달리던 마른 나뭇가지에 따뜻한 봄 햇볕이 내려 하얀 목련꽃 봉오리를 틔워냈다. 그 기쁨을 아는 듯 작은 새가 목련꽃 옆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겨울 내내 얼어있던 땅을 뒹굴던 갈색의 마른 나뭇잎들도 여린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느낌을 기막히게 잘 잡아낸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류경채이다.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로 임명된 류경채는 학교 바로 뒷동네인 서울 신촌에 집을 마련했고 평생을 한 집에서 가족들을 보살피고 그림을 그렸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도 신촌은 서대문 방향의 안산에 가로막혀 서울 도심지에 가까운 곳이면서도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서 류경채는 사계절의 흐름과 그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물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수용했다. 1950년대에 그려진 ‘산길’ ‘가을’ ‘신촌길’ 등은 모두 신촌의 풍경을 담아낸 것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 그림 ‘봄’도 자신의 집 근처에서 포착한 봄의 생동감을 표현 낸 작품이다.

▲ 류경채, <봄>, 1956년, 캔버스에 유채, 97x130cm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폐림지근방’은 자연에 대한 이 작가의 관심이 남다른 것이었음을 반증해 주는 한국근대미술사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폐림지근방에 대한 수상평을 살펴보면, “한국화단에서도 자연대상의 재현으로서의 사실적인 표현양식에서 표현주의적인 표현양식으로 전환, 객관 사실에서 주관 표현에로의 전환을 공인한 하나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 붙여졌다. 이 평은 류경채가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단지 대상물의 재현에 머물지 않고 자연물을 매개로 역시 자연물의 하나인 인간의 희노애락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류경채는 언제나 자연을 관찰했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삶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분노와 해탈의 모든 감정을 그의 화폭에 쏟아 부었다. 류경채의 그림은 초기 구상회화에서 후기 추상회화에 이르기까지 이 기조를 굳건히 유지해 나가면서 점점 더 성숙되어 갔다.

폐림지근방이 그려진 지 7년 후에 그려진 이 그림 역시 서정적 자연주의 화가 류경채의 감수성과 조형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해에 류경채는 3남 인(仁)을 얻었고 제5회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런 기쁨의 느낌이 봄의 정취에 실려 이 그림을 더욱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수직과 수평으로 뻗어나간 가지 사이사이로 꽃망울을 터뜨린 목련 꽃잎, 그 순간을 함께하는 작은 새의 지저귐, 한시라도 뒤질세라 이곳저곳에서 싹을 틔우는 다른 어린 나무들의 시샘까지 봄은 그렇게 서둘러 류경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최은주 경기도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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