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가산 이효석(1907~1942) 생가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 있다. 봉평은 이효석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 주민은 고작 5천700 명인데 메밀꽃을 찾는 관광객은 한 해 25만 명을 넘는다. 이들이 대부분이 맛보고 돌아가는 것이 메밀음식이다. 메밀은 지금은 성인병에 좋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황작물이었다. 생육기간이 짧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서다. 전국 어디에서도 메밀은 자라지만 봉평이 유명한 것은 순전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이다.

봉평에서 흥정천을 건너면 1990년 전국 제1호 문화마을로 지정된 효석문화마을이 나온다. 매년 8월말이나 9월초 메밀꽃이 필 무렵이면 이곳에서 평창효석문화제가 열린다. 이때가 되면 소설 그대로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문학관에서 약1km쯤 가면 생가가 나온다. 현재는 홍씨들이 살고 있는데 이효석 부친이 이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처음은 초가였는데 새마을운동 때 함석으로 개축되었고, 2004년에 지붕 누수로 기와로 개보수 하였으며, 사유재산이라 정부에서 따로 지원되는 관리비가 없다고 한다.

앞마당에서 집을 바라보면 뒤쪽이 허하다. 뒤를 막아주는 현무봉이 없어서다. 맥이 없는 땅이 아닐까 싶어 뒤로 가보았다. 왼쪽 봉우리에서 작은 맥 하나가 내려와 겨우 집으로 이어진다. 맥이 옆으로 뻗었기 때문에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약한 맥이지만 맥은 맥이다. 속담에 논두렁 맥이라도 받아야 면장이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효석의 부친이 진부면장을 한다. 그러나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혈로 보기는 어렵다. 우선 좌청룡 끝이 불끈 솟았고 살짝 비주하고 있다. 백호와 안산도 있긴 하지만 이곳을 똑바로 향하고 있지 않다. 만약 용맥이 기세가 있어 집터 기운에 강했다면 주변 산들이 모두 이곳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이효석은 전주이씨로 한성사범학교 출신인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홍경의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창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경기중·고등학교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인 1928년 단편소설 「도시의 유령」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31년 화가 지망생인 이경원과 혼인하여 2남2녀를 두었다. 결혼 초기 직업이 없어 일본인 은사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검열계로 취직한다. 그러나 주변의 눈치가 따가워 보름 만에 그만 두고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이주한다.

경성에서는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하여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효석 문학의 진면목이라 할 수 순수문학을 추구한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1936년 ‘메밀꽃 필 무렵’ ‘들’ ‘산’ ‘인간산문’ ‘분녀’ 등 220여 편의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수필, 평론을 발표한다. 1940년 부인이 사망하는데 거기에 어린 둘째아들마저 죽자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방황한다. 이 과정에서 건강을 해쳐 1942년 뇌막염으로 36세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진부면 면장이었던 부친에 의해 평창군 진부면 한전부리 논골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묘는 여러 번 이장되며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1973년 영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되었다. 그런데 1998년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되면서 또 다시 묘역이 경기도 파주시 이북5도민의 공원묘원인 동화경모공원묘원으로 이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은 ‘메밀꽃 필 무렵’의 상징성을 상실한다며 이장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유족들은 평창군이 이효석 문화축제를 하면서도 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며 서운함을 표시하였다. 다행히 평창군과 유족 간에 협의가 이뤄져 조만간 봉평으로 다시 이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생가나 묘 하나가 그 지방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 이런 측면에서 풍수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