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며 은거했던 운곡 원천석(1330~?)의 묘는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 치악산 자락에 있다. 원천석은 고려 망국의 한과 무상함을 읊은 시조로 유명하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시험에도 자주 나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의 시 한 수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살다 간지 70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국민 작가인 것이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목동의 피리소리)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원천석의 본관은 원주다. 원씨는 원주원씨 단본이나 계파는 원경의 운곡파, 원극유의 원성백파, 원익겸의 시중공파 등 3개 파로 크게 나뉜다. 원천석은 운곡파로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와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파견된 8학사 중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정착한 원경의 19세손이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라이벌 관계였던 원균 장군은 원성백파다. 원천석은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국자감 진사가 되었다. 당시 신진사대부의 리더인 목은 이색과 교류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이방원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성계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자 원천석은 고향인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지금의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태종로 287) 치악산국립공원 매표소 바로 위쪽이다. 이방원이 1400년 제3대 왕(태종)으로 즉위하자 스승을 요직에 기용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이 직접 찾아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원천석은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만나주지 않았다. 지금도 태종이 머물던 곳에 ‘주필대’라는 표석이 있으며 흔히 ‘태종대’라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원천석은 개울가에 빨래하는 노파에게 자신을 찾는 사람이 오거든 횡지암 쪽으로 갔다고 일러주라고 당부를 했다. 그리고 본인은 그 반대 방향인 비로봉 동쪽 바위굴 변암으로 가 숨었다. 태종은 노파가 가르쳐주는 곳으로 갔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중에 자신에게 길을 물었던 사람이 임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노파는 임금에게 거짓을 아뢰었다는 죄책감으로 빨래터 아래 소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를 ‘노고소’라 부르며 마을에서는 매년 노파에 대한 제를 올리고 있다. 배향산은 태종이 만나지 못한 스승을 향해 예를 갖춰 절을 했다는데서, 수레넘이고개는 태종의 수레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는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원천석의 묘는 태종의 요청에 의해 무학대사가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반인들은 쉽게 잡을 수 없는 괴교혈이다. 혈이 기이하고 교묘하여 일반적인 기준과는 다른 것을 말한다. 천장지비(天藏地秘) 즉,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선행을 많이 베풀고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 그 보답으로 준다는 혈이다. 그만큼 괴교혈에는 대혈이 많다. 그러나 욕심 많고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 괴교혈을 탐하다가는 흉지를 길지로 착각하여 오히려 큰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만약 지관이 함부로 누설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혈이기도 하다.


괴교혈은 많은 종류가 있는데 원천석 묘는 기룡혈(騎龍穴)에 해당된다. 혈이 용을 타고 있다는 뜻이다. 보통의 혈은 산맥 끝자락인 용진처(龍盡處)에 맺는다. 그런데 기룡혈은 용의 중간에 있다. 얼핏 보면 3대를 못가서 망한다고 하는 과룡처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땅의 생기를 저장할 수 있는 입수도두, 선익, 순전이 확실하게 있다. 그 모양이 사람의 배꼽 같기도 하다. 그만큼 기가 모인 땅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 오대산(1천563m)에서 비롯된다. 양평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중간인 삼계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맥이 매화산(1천84m)을 거쳐 치악산을 세웠다. 치악산의 초고 봉우리인 비로봉(1천282m)과 향로봉(1천41m) 사이에서 내려온 용맥에 원천석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치악산이 높고 험하지만 이곳만은 순하고 깨끗하다. 어떤 산세 든 순하고 깨끗한 곳에 좋은 땅이 있는 법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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