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꿈, 연애는 사치"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김 모(35) 씨는 대학 시절 이후로 연애를 끊었다고 말한다. 김 씨는 "현재 월급은 160만 원 정도인데 여기서 절반은 저축하고 나머지는 용돈, 통신비, 밥값 등 생활비로 나간다"며 "외롭기는 하지만 연애에 들어가는 비용이 겁난다"고 말했다.

전자제품으로 유명한 대기업에서 대리로 근무하는 이 모(32) 씨는 취업 이후 연애를 꾸준히 해왔다. 덕분에 남들보다 결혼도 빨랐다. 이 씨는 "경제적 여력도 충분한 데다, 주변에서 꾸준히 소개가 들어왔다"며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나 어렵지 않게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육아 휴직 후 복귀했다.

사랑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최근 발표한 각종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이성 교제 비율은 취업 여부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났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직업의 안정성과 소득 규모에 따라서도 엇갈렸다. 이런 격차는 결혼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자리 현실로 사랑이 교차하는 셈이다.

◇ 소득 따라, 격차 따라...연애는 갈린다

"아무 꿈도 없이 무직이라면 헤어질 것 같아요. 돈 없이 계속 데이트하기는 힘들잖아요."

미혼 여성 A(30) 씨가 지난해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청년층의 경제적 자립과 가족 형성에 관한 한일 비교연구' 보고서를 통해 한 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층의 구직 상태는 이성 교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남성 33.3%, 여성 36.5%로 나타난 미혼 청년층의 전체 이성교제 비율은 취업 여부에 따라 극명히 엇갈렸다.

남성의 경우 취업 상태에서 이성교제비율은 35%였으나, 미취업 상태에서는 26.4%까지 떨어졌다. 여성 역시 취업 상태에서 이성교제비율은 37.5%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5%포인트 이상 높았다.

대부분 청년은 직업이 없으면 교제는 생각하기도 힘들다고 토로한다. 미혼 남성 B(30) 씨는 "내가 지금 (직업을 포함해) 아무것도 없는데 상대편도 비슷한 처지라면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기업의 규모나 채용 안정성도 이성교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공공기관 및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미혼 남성은 55.4%, 여성은 39.9%가 이성교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재직자 역시 남성 50.4%, 여성 42.1%로 절반 가까이가 이성교제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반면, 소기업이나 개인사업장의 경우, 남녀 모두 3명 중 1명도 채 이성교제를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규모에 따라 최고 20%포인트 가까이 격차가 벌어지는 셈이다.

◇ 결혼도 소득에 따라

경제적인 현실에 따른 사랑은 결혼으로까지 이어진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16년 발표한 '저출산과 청년 일자리'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의 임금 수준에 따라 결혼 비율이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 수준이 가장 낮은 1분위(하위 10%)에 포함된 20~30대 남성의 경우, 기혼자 비율은 6.9%에 불과했다. 이 비율은 소득 분위가 높을수록 비례해서 증가해 10분위의 경우에는 82.5%에 달했다. 소득에 따라 최고 10배 이상 결혼 비율이 차이가 나는 셈이다.

고용 형태도 마찬가지다. 안정적일수록 기혼자 비율은 높다. 고용주인 20~30대 남성 중 기혼자 비율은 75.5%로 가장 높았고, 자영업이 63.6%로 그 뒤를 이었다. 정규직은 53.1%로 절반이 넘었지만, 비정규직은 28.9%에 불과했다. 실업자는 11.6%, 비경제활동인구는 4.7%에 그쳤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모(34) 씨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서른 살 무렵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시를 여러 번 되뇌었다"고 기억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이라는 현실 앞에서 사랑을 포기한 내용을 노래한 시다.

김 씨는 "당시 3년 이상 만나던 여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했다"며 "미래가 불투명했던 당시의 나와 결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나 역시도 결혼 뿐만 아니라 연애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취업준비생 10명 중 7명 이상은 취업 준비 때문에 연애를 포기했다고 밝혔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취준생 74%는 '취업 준비로 연인과 이별을 경험했거나 연애를 포기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사랑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30%가 금전적인 이유로 연애를 포기한다고 답했다. 이밖에 '취업 외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다'(26%), '취준생이라는 신분에 좌절해서'(21%) 등의 답이 뒤를 이었다.

◇ 문제는 결국 '비용'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기회 비용의 문제라고 분석한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저소득층 젊은이들이 연애나 결혼 빈도가 낮은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라며 "혼수 준비, 신혼집 마련, 육아 비용 등 적잖은 비용을 수반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힘들기 때문에 결혼을 염두에 두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최근 발표한 '2018 결혼 비용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신혼 부부의 평균 결혼 자금은 2억3천85만원으로 나타났다.

신혼집 마련이 1억6천791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예물과 예단이 각각 1천400여만 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예식장 비용(1천324만원)이나 혼수용품(1천200만원) 등으로도 큰 돈이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정보회사 듀오 김승호 홍보팀장은 "2010년대 들어 소득이 높을수록 연애 경험이 많고 결혼 만족도도 높은 경향이 두드러졌다"며 "안정된 일자리를 갖지 못하면 결혼 포기 확률도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홍석철 교수는 "저소득층 젊은이들의 경우 아르바이트 등 노동시간이 많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연애의 '기회비용'이 높다"라며 "연애를 택하면 다른 시간을 포기해야 되는데, 그 선택이 먹고 사는 부분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 역시 "미래 소득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결혼을 포함한 연애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중소 기업과 대기업 사원 간의 결혼율이 격차가 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는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홍석철 교수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소득을 높이거나 정책적으로 이 같은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제언했다. 홍 교수는 "전자는 최저임금 상승이나 청년 일자리 지원이 그 방법이고, 후자는 청년에 대한 주거지원이나 다양한 복지정책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저출산·인구고령화의 원인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저출산 고령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고용안정성을 높이고 주택 가격의 과도한 상승을 막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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