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장인어른께서 예기치 않게 세상을 뜨시면서 경황 중에 장례를 치르던 중, 비석에 새길 비문의 문구를 놓고 가족 간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의식(儀式)에 관한 차이로 가벼운 이견이 있었으나 지혜를 모아 합의점을 찾은 일이 있다. 그 후 어른을 모신 지 사흘 만에 자손들이 함께 봉분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묘소를 참배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묘지의 풍경을 바라보다 새삼, 교회의 뒤뜰이나 도심 가까이에 묘원(墓園)이 있어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는 서구의 묘지문화와는 그 광경이 크게 다름을 느끼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곳의 묘원과 묘비에 관련된 지난날의 추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유럽에 체류하던 시절, 음악가들의 묘지 순례를 했던 적이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19세기부터의 죽음을 품고 있는 파리의 ‘페르-라세즈’이다. 가로 세로 1.5km이니 엄청난 규모다. 기실, 쇼팽과 비제의 무덤을 찾고자 간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엔 문학가 몰리에르, 발자크,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땅, 마리아 칼라스, 이사도라 덩컨, 화가 들라크루아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도 만날 수 있어 마치 위대한 정신과 영혼의 집합체를 보는 듯했다. 다음이 ‘빈 시립중앙묘지’이다. 빈 인구의 두배가 훨씬 넘는 5백만 기의 무덤이 있는 곳이니 그 규모 또한 짐작할만하다. 그곳 음악가 묘역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등 고전에서 낭만까지의 거장들이 잠들어있었고 이들 작곡가들의 묘에는 줄 이은 참배객들이 두고 간 꽃들 때문인지 따스함과 생기가 느껴졌다. 파리와 빈, 두 곳의 묘지 모두 넓은 녹지대 속에 아름다운 공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 아래 벤치엔 산책 나온 주민들이 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특히나 햇볕이 따스한 날이면 멀리 솟은 몽파르나스 타워와 파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페르-라세즈’에선 젊은 연인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대게 그 연인들은 이제 출발점에 있을 테니 그곳에선 끝이 아닌 시작을, 죽음이 아닌 삶의 생기를 마주하는 듯하다. 이렇듯, 유럽의 묘지들은 비통하고 절망적인 것이 아닌 평화롭고 온화한 느낌으로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자연스레 느끼게 해 준다.

최근엔 장례풍습이 다양해지면서 무덤을 갖지 않아 묘비 자체가 필요 없는 경우도 있지만, 예전엔 동서양을 통해 망자가 생전에 뜻하며 살았던 자취를 묘비에 새겨 후세에 전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묘비명’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영국의 극작가이자 사상가인 ‘죠지 버나드 쇼’이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디’의 원작 ‘피그말리온’을 쓰고, 노벨문학상과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그는 생전에 스스로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유명한 묘비명을 남기고 갔다. 그러나 그의 실제 삶은 전혀 우물쭈물 한 삶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설과 풍자를 문학과 삶에 연결시키며 익살과 위트로 무장한 독특한 철학적 가설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적 권위와 질서에 도전했던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인생이 희극으로 잘 연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남긴 역설적이고도 해학적인 경고 같은 이 짧고 의미심장한 묘비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히 유의미한 울림을 준다.

지난 주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내를 위로하며 다시 묘소를 찾았다. 그날도 부슬비가 내렸지만 그간의 몇 차례 봄비 덕분인지 푸른빛이 완연해진 묘원의 나무들에 더해, 새 봉분의 잔디도 제법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내려오는 길, 수많은 묘비의 낯선 이름들을 나지막이 소리 내어 불러보며 하나의 이름마다 하나의 소중한 삶이 있었을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주는 경종처럼, 우물쭈물하다 어느 틈에 회한의 죽음을 맞기 전, 남아있는 나날이 감사의 삶이 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면서...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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