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4년,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하는 외국인 대상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 최종 합격자가 발표됐다. 신라의 대당 유학생인 약관의 천재 최치원이 장원을 한 것이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유학 온 그는 8년간의 공부 후 단번에 과거에 합격했다. 그것도 단순 합격이 아니라 장원이라니. 당나라의 빈공과는 당과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외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급제하기가 너무 어려워 ‘서른 살에 명경과에 급제하는 것은 늦은 것이고, 쉰 살에 빈공과에 급제하는 것은 젊은 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신라의 최치원이 장원급제를 했으니 당나라 내부에서도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최치원의 빈공과 장원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신라가 기뻐하는 만큼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곳은 발해(渤海)였다. 최치원이 합격을 할 때 합격자가 30명이었고, 그중 발해인도 포함돼 있었으나 장원을 신라에게 빼았겼으니 억울하고 분통할만한 일이었다. 발해는 건국 직후부터 신라에 비해 당나라에 더 많은 유학생을 보내고, 빈공과에서의 합격률도 신라보다 높았다. 그래서 발해는 자신들이 신라보다 늘 우위를 차지한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치원이란 젊은이가 나타나 자신들의 자존심을 짓밟았으니 그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단순히 누가 장원을 차지했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숨은 의미가 있다. 원래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발해에 있어 신라는 ‘원수의 나라’나 마찬가지 였다. 신라 역시 자신들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는데, 고구려의 옛 땅에서 그 후예들이 말갈족을 백성으로 삼아 발해를 건국했으니 통일의 의미도 사라진 것이고, 다시 대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즉 당시 상황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발해’와 ‘신라’로 변경된 때였고, 이 두 나라는 국경의 대립만이 아니라 당나라에서의 외교전도 치열했다. 발해와 신라는 사사건건 당나라에서 외교적 마찰을 빚었고, 끝내 빈공과 합격률을 가지고도 치열하게 싸우기까지 했다. 발해와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남국(南國)’, 발해를 ‘북국(北國)’이라고 칭했다. 남국과 북국의 대립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대립에 이어 새롭게 전개되며 새로운 남북국시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발해와 신라로 구성된 남북국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사실 발해는 왕건이 후 삼국을 통일 하기 전 거란에 의해 먼저 멸망됐는데, 왕건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기 때문에 같은 민족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같은 민족은 하나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발해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비록 과거 발해의 영토를 온전하게 되찾지는 못했지만 이제 진정한 통일 국가를 이루어 하나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국격을 높이고 스스로 황제의 국가임을 천명하며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분단돼 힘이 갈라졌던 남북국의 통일이 백성 모두에게 기운을 주어 고려의 위상을 높이고 강력한 나라를 만들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일의 힘’이다.

내일이면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열린다. 1945년 광복 이후 외세에 의해 분단돼 신남북국시대 처럼 돼버린 비운의 한반도 땅에서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가 만나 평화회담을 개최하는 것이다. 분단체제 이후 우리는 발해와 신라처럼 긴 시간을 긴장국면 속에서 대립 해왔다. 남과 북 모두 상대방을 괴뢰정권이라 부르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분단 70여년 동안의 대립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휴전, 즉 보이지 않는 전쟁 중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 한민족 전체를 위해서 남국과 북국의 대립을 중지하고 완전한 핵무기 폐기를 포함해 ‘종전(終戰)’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사회와 함께 경제 교류, 관광 교류, 스포츠 교류도 하고 가장 시급한 이산가족 상봉을 수시로 추진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남북국시대의 통일이고, 통일이 되면 우리의 힘은 세계를 주도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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