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는 주택건설현장에서 전기관련 공사를 도급받아 공사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대금을 제때에 받지 못했다며 공사대금 청구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상대방인 피고는 위 공사대금 소송절차에서 자신의 주장과 입증을 할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수도권에 소송을 위하여 올라오는 것도 불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자기 방어권을 충분하게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사소송절차에서는 변론주의가 지배하기에 일방 당사자가 아무리 억울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정을 법리적으로 주장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패소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1심 재판에서는 원고가 전부 승소하였다. 피고는 판결문을 받아보고 억울하다면서 항소했다. 항소심에 이르러 피고는 원고가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채 마무리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피고가 다른 공사업자를 불러 완성하였다는 항소이유를 주장하였다. 피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추가 공사비 영수증, 확인서 등 증거자료도 제출되었다. 소송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셈인데, 재판부에서는 조정위원회 조정에 회부하였다.

이 사건은 공사대금 사건이기에 공사전문가인 조정위원과 법률전문가인 필자 두 명이 조정위원으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조정위원들이 정해진 시간에 당사자 쌍방을 호명해 보니 피고는 출석하였으나 원고가 불출석한 상태였다. 조정이란 쌍방이 참석해야 진행이 가능하므로 원고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원고는1심법원이 열렸던 광명시법원으로 잘못알고 갔다가 지금 부지런히 수원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조정위원들은 하는 수 없이 원고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원고는 무려 정해진 시각보다 40분이나 경과했을 무렵 도착 하였다. 조정실에서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조정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지금 시각 대에는 우리가 조정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아직도 방을 빼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거칠게 항의하였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으나, 계속해서 조정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위원들은 원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하여 듣고 말하고 타협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늦게 도착한 원고는 ‘공사대금을 제 때에 받지 못해 원금, 이자, 그로 인한 손해 등 피해가 많아요. 즉시 돈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조정에 응할 수 없어요!’ 아주 퉁명스러운 어조였고, 심지어 조정위원의 말을 잘라 끼어들어 본인 위주의 말만 되풀이 하였다. 조정은 쌍방당사자가 각자 양보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 법원이 당사자 쌍방에 모두 소송결과에 위험부담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건 중에서 조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조정절차에 회부하는 결정을 했건만, 원고는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고 완강하였다.

그런 와중에 또다시 조정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까 항의했던 분과 그 사건의 조정위원들이었다. “그 조정사건 시각 30분이 경과한 시점부터는 우리가 방에서 조정 절차를 진행해야 하는데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라고 소리쳤다.

듣고 보니 그쪽의 사정도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필자 입장에서도 아무런 영문을 모르니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법원 청사 사정이 비좁아 30분 단위로 조정실 사용을 하도록 배정해 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 사정을 미리 통보받지 못했다. 보통의 사건의 경우는 30분정도의 조정시간을 배정하지만 사건에 따라서 1시간 이상을 할애하여 조정시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은 1건만을 배당받았고, 같은 방에서 30분 후에 다른 조정위원과 당사자가 조정예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발생한 해프닝이다. 더군다나 우리 당사자중 원고가 40분 이상 지각하는 바람에 더 지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정도 불성립 되었다. 방을 나서는 순간, 기다리는 당사자와 조정위원들이 우리를 화난 얼굴로 쳐다본다. 우리로서는 법원당국을 원망할 수도 없고 기다리는 분들에게 같이 되받아 칠 수도 없고 우리 당사자에게 화낼 수도 없어 답답할 뿐이다.

분쟁이 조정에 의하여 종결된다면, 사회적 비용 절감, 당사자의 감정해소, 법원의 업무 감소 등 절대적인 유용성이 있다. 필자는 조정위원 봉사활동에 보람을 느끼고 있지만 오늘은 왠지 법원 조정장을 나서는 기분이 우울하기만 하다. ‘최선의 판결보다도 최악의 조정이 더 낫다’는 법언(法諺)이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조정은 계속 되어야 한다.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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