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값은 얼마일까? 이런 물음을 갖는 것은 불경(不敬)하고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른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확실히 우월한 여러 기능을 갖고 있다. 신성(神性)을 향해 기도를 올릴 줄 아는 지혜를 소유했고, 오늘의 삶에서 내일을 향한 설계를 마련할 줄 아는 이성을 갖고 있다. 결코 값으로 계산하거나 한정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神)이 인간에게 가장 공평하게 분배 한 것은 양식(良識)의 양심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누구에게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이성의 샘물인 양식을 주었지만, 그 양식의 선을 얼마나 스스로 제어하고 통제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귀속된다. 바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정신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아질 때, 인간은 정도(正道)의 길 위에서 살아야 한다. 아무리 느리게 걷더라도 정도를 걷는다면 뛰어가는 사람이나 양식없는 사람을 앞서 갈 수 있다고 말했던 데카르트의 인간관은 합리위에서 세운 인간관이었다. 항상 현실을 살고있는 사람은 오늘 위에 자기의 확실한 선을 남기면서 살고 있지만 자기를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사물을 바라볼 줄 모르면서 맹목(盲目)이 되어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로 인하여 불행과 아픔의 사고(四苦)의 바다를 헤메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공평한 선에서 출발하지만 사는 과정에서는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삶을 누린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에서는 또다시 공평한 ‘없음’으로 돌아간다. 흔히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네덜란드의 스피노자를 기억한다. 탈무드 성경 등을 배우다가 교리에 대한 의혹이 생겨 성경을 비판하므로 교회의 지도자를 당혹시키고 이로 인하여 여러번 함구할 것을 조건으로 좋은 대우가 제시되었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하여 당시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국립대학인 하이델베르그의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어렵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스피노자에게 교수직의 존경과 생활의 빈궁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아스팔트 길이였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위해 깨끗이 거절했다. 불란서의 J.P.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했다. 그것은 그의 8년 후배인 A까뮤가 그보다 7년 전에 수상했다는 것이 거부의 내용이었다. 얼핏보기에 납득할 수 없는 고집같지만 문인(文人)이라는 자존심과 오만성, 여기에서 정신적 자유가 나온 것이다. 노벨상은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톨스토이는 노벨상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문학세계는 영원성으로 빛나고 있다. 인간이 만드는 정신 가치는 무한의 탑을 쌓아 올린다. 그것은 결코 일정한 틀로 감금할 수 없는 자유 정신속에서 위대한 생명력을 갖는다. 권력이거나 금력앞에 무력하게 무너질 때 인간의 양심조차 무너지게 된다. 인간의 양심이 무너질 때 그 가치는 불타버린 연탄 덩어리만큼 무가치한 것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는 양심에 불을 켜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어느 시대이든 자기를 지키고 산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런 사람은 고독과 외로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 고통의 비례만큼 영원함으로 되살아난다. 현실은 항상 갈등과 고통, 그로 하여 미로(迷路)를 헤매는 방황앞에서 눈을 뜨고 타인에 사랑을 베풀 때 내 몸을 데워주는 이상의 힘이 되어 빛을 남긴다. 나를 버리고 헌신하는 사람의 등불을 켤 때 인간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고(至高)한 존재인 것이다. 오로지 스스로가 선택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명수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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