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을 촉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은 대도시를 발생시켰고 인간의 삶의 환경과 지구 생태계를 급격하게 바꾸어놓았다. 지구의 지배 세력을 교체시켰으며 계층 분화의 규칙을 바꾸었고 인류를 이전과 다른 종으로 진화시키고 있다.

급기야 전 세계가 편을 갈라 전쟁을 했다. 이번엔 창과 칼이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원자폭탄 투하로 종지부를 찍었다. 인류의 과학기술이 대량살상무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종전(終戰)과 함께 국제사회가 과학과 인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적인 기구를 모색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유네스코 초대 의장이었던 헉슬리의 조사에 의하면, 1)과학자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파괴적인 연구가 아니라 건설적인 연구를 해야 할 책임이 있고, 2)진리를 추구하되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다하여야 한다는데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돌이켜보면 과학기술 발전의 혜택과 피해는 모두에게 언제나 균등하지 않았다. 열악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더 오염된 공기와 물을 마시며 더 많은 기술적 위험에 노출되었다. 항생제의 발명, 의료기기의 발전, 다양한 신약 발굴을 통해 극복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던 수많은 질병들이 극복되어 왔지만 모두가 평등하게 최신 의료기술의 세례를 받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정보기술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정보기술을 사용해서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과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간격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정보=경제력’이라는 등식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정보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플랫폼을 보유한 주체는 비대칭적인 권력을 가진다. 최근 연구 결과들은 양극화를 넘어 초양극화 시대의 개막을 점치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발생한 재화를 전통적인 개념으로 균등하게 배분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일자리 정책만 봐도 그렇다. 일자리 문제의 직접적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복합적이지만, 근원적으로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사회 시스템의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 고도 성장기에는 외국에 이미 존재하던 산업을 국내에 맞게 끌어들여 고용을 창출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세상에 없던 무엇인가를 개척해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국면에서 우리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기에 겪는 증상이다. 기존 기업을 압박해서 일자리를 쪼개는 것도, 부족했던 공무원 숫자를 늘리는 것도 방법이야 될 수 있겠지만 지속가능한 해답은 아닌 것 같다.

어린(?!)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선순환을 유도하려면 반드시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크고 작은 영역, 분야 등이 탄생해야 한다. 새로운 판이 열려야 하는 것이다. 그걸 하는 것이 곧 연구개발이다. 연구개발은 과거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단순한 지식의 생산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적 노동이다. 연구개발의 결과물들은 기존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한다. 연구개발은 그 과정 자체에서도 일자리를 만들고, 그 결과물을 통해 더욱 큰 일자리 기회를 만든다.

물론 연구개발만이 해답의 모든 것은 아니다. 정치적 사회적 노력과 연구개발이 융합되어야 한다. 대기업은 이미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은 새로운 아이템이 절실하지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공공기관의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야 할 동기와 보상이 분명치 않다. 어쩌면 기업에게는 기술을 대신 개발해주는 것보다는 잠재적 자원이 풍성한 환경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재난 안전, 환경, 보육, 요양, 교통, 치안 등 우리 사회에는 공공의 연구개발 역량이 필요한 곳들이 숱하다. 당장 돈이 되지 않으니 민간 기업은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손대려 하지 않는다. 규제도 촘촘하다. 역설적으로, 여기가 지속가능한 발전의 잠재력을 축적할 토양이 아닐까.

과학을 재앙이 아니라 축복으로 만들 수 있는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직접적인 영리가 기대되지 않는 곳에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역량을 동원할 수 있느냐에 반전의 기회가 있다. 연구개발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분권의 거대한 흐름이 시작되었다. 도전에 직면한 지방정부의 생각은 어떤지...

정택동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원장, 서울대 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