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와 조팝나무가 배부르게 하는 북한강변 45번국도 조안면에서 86번지방도 월문리로 넘어가는 고래산길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있다.

이맘때는 춘궁기인 보릿고개가 한참인 시절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겠지만 분명히 내게도 그런 시절이 불과 몇 십 년 전에 존재했다. 하얀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와 작은 팝콘을 닮은 조팝나무가 짧은 절정을 지나면 비로소 보릿고개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아카시아가 만발을 한다.

깨끗하고 반 의 반은 덜 핀 꽃대를 꺾어 입안에 넣고 가지를 훑어내면 입 안 가득 아카시아향이 가득해지고 뒤늦게 달달한 아카시아 꿀이 혀를 자극한다. 그렇게 열 몇 개쯤의 꽃대를 먹고 나면 고팠던 배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흑백사진의 연속사진을 보여주는 고래산길에서의 라이딩은 언제나 행복함과 엄마 품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해 준다.


나는 라이더다. 불과 경력 6년여의 병아리를 막 벗어난 중닭수준의 라이더지만 만족감과 성취감은 남다르게 느끼고 있다. 열혈청년도 아닌 국민연금수령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전립선 질환을 걱정해야 할 나이에 라이딩에서 새삼 자유를 느끼며, 더 중요한 것은 직업적 소재를 제공받는 다는 것이다. 자동차여행에서 느끼지 못했던 꽃향기와 바람의 크기와 온도, 색, 부드러움과 빗방울이 주는 속삭임까지 고스란히 내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느낌은 어디에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감동이다. 계절의 속살을 소름 돋도록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맛 볼 수 있는 라이딩은 다른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나만의 독특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억새에 존재감마저 빼앗긴 갈대꽃의 옅은 보랏빛마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바이크 헬멧의 고글을 통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게 하고, 부지런한 모내기 풍경의 논두렁 옆을 달리다가 하얗고, 분홍빛 찔레꽃이 가득한 모습이 보이면 섣불리 풍년을 그려보기도 한다. 산그늘의 잔설과 얼음을 조심조심 넘어가다 보면 비탈 밭에 부지런한 농부가 뿌려놓은 퇴비냄새를 맡으며 새 봄이 왔음을 알게 된다. 라이더의 시계는 바람이며, 라이더의 달력은 꽃이다. 그리고 라이더의 심장은 태양과 구름과 빗방울이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영상에 등장한 한글 캘리그라피 ‘꽃’을 작업 할 때에도 내게 영감을 준 것은 라이딩시 내 가슴에 안겨왔던 인동초의 자태였으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동백의 거칠지만 진하고 붉은 각혈 같은 꽃봉오리였다. 가끔 소음을 유발하여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바이크를 만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통신호를 어기며 질주하는 라이더를 만날 때도 있을 것이다.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하지만 모든 라이더들이 그런 존재들은 아닌 것이다. 거의 모든 라이더들은 소심하며, 햇빛 한 조각에 감탄사를 뱉고, 아이들과 어르신들의 존재에 브레이크를 한 번 더 잡게 되는 사람들이다.

몇 년 만에 이번 주말에 바이크로 제주 라이딩을 떠난다. 완도까지의 라이딩에서 만날 꽃들의 모습에 설렘이 가득하고 바이크를 실은 배위에서 만날 남해의 바람이 궁금하다. 섬 가득 차있을 새 귤꽃 향들이 나를 반겨주는 꿈을 요즘 매일 꾼다. 사려니 숲에서 만날 제비꽃과 대정읍 추사관 돌담에 기대어 남아있을 아기동백의 발랄한 꽃송이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내 삶의 고동은 오늘도 잔잔하게 뛴다.


유현덕 한국캘리그래피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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