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의 대표 작가인 김유정(1908~1937)의 생가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 868-1(실레길 25)에 있다. 김유정은 이곳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심씨의 2남6녀 중 일곱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청풍김씨로 10대조가 최초로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이다. 9대조는 현종의 국구인 김우명이며, 고조부 김기순 때 이곳 실례마을로 이주해 왔다. 증조부 김병선은 학당을 열고 화서학파의 거유인 김평묵을 초빙해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조부 김익천은 6천석 부자로 음직으로 도사(都事) 벼슬을 했다.

조부가 사망하자 아버지 김춘식은 가족들을 이끌고 의병 봉기로 어수선한 춘천을 피해 서울로 이사했다. 김유정이 6살 때다. 이사한 집은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100칸이 넘는 저택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집안의 불행이 시작됐다. 풍수에서는 이사할 집을 중요시 한다. 한 집안의 흥망성쇠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잘 살던 사람이 이사하고 나서 형편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렵게 살던 사람이 이사하고 나서 형편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모두 집터의 영향으로 본다.

김유정 가족이 이사한 운니동 집터는 안 좋았던 모양이다. 이사 온지 1년도 안돼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더니 사망하고, 2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 김유근은 부인을 셋이나 뒀다. 또 우미관을 통째로 빌려 매일 기생파티를 하는 등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했다. 마침내 운니동 대저택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 가더니, 결국 망해 춘천 실례마을로 되돌아갔다. 서울 살이 14년 만이며 김유정의 나이 20세 때다.


형네가 춘천으로 이사 가자 김유정은 삼촌 집에서 지내며 휘문고보를 다녔다. 그러나 냉대가 심해 졸업과 동시에 둘째 누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누님은 이혼을 하고 양복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김유정은 22세 때인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곧 그만둔다. 이때 명월관 기생 박녹주를 짝사랑해 매일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박녹주는 읽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혈서로 애원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하지만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골방에 처박혀 날마다 애를 태우던 김유정은 육신이 망가져 늑막염과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그럼에도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셨다. 지병인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자 1931년 23세 때 실레마을로 귀향한다. 고향에서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야학당을 열었다. 1932년에는 야학당을 넓혀 간이학교인 금병의숙을 차린다. 이 기간이 1년7개월 정도인데 김유정 인생에 있어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형 김유근은 고향에서도 가산을 완전히 탕진하고 조상 묘까지도 모두 파묘해 화장해버렸다. 할 수 없이 김유정은 1933년 25세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셋방살이를 하는 누이 집에 얹혀살았다.

김유정은 돈을 만들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글을 썼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각각 당선됐다. 뒤이어 ‘금따는 콩밭’ ‘만무방’ ‘산골’ ‘봄·봄’ ‘동백꽃’ 등이 발표되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이미 몸이 쇠약해져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병이 깊어지자 경기도 광주 중부면에 있는 다섯째 누이 유형 집으로 거처를 옮겨 요양을 한다. 그러나 매일 통증과 오열에 시달리다 결국 두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 돼 조카에 의해 한강에 뿌려졌다.


김유정 생가는 오대산에서부터 맥이 이어진다. 태조산인 대룡산(899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용맥이 수리봉을 거쳐 이곳의 주산인 금병산(651.6m)을 세웠다. 산세가 비단병풍을 친 것처럼 생겼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마치 물결처럼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산을 풍수에서는 문곡성(文曲星)이라고 한다. 오행으로는 수성체로 본다. 문곡수성 산세에서는 총명하고 문재가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나 간혹 음란해 패가망신하기 쉬운 인물이 난다고 옛 책은 적고 있다. 김유정의 삶과 이곳 풍수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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