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선병원 앞이다. 한 여인이 큰 저택 앞에 놓인 차에 아기를 두고 총총히 떠난다. 우스꽝스러운 떠돌이 하나가 아기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하지만 잘 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누추한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흑백 영화의 도입부다. 1921년 뉴욕에서 개봉된 찰리 채플린의 첫 장편영화 키드(The Kid)다.

이 영화는 사실상 채플린의 어릴 적 인생이다.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고아 신세가 되었던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하고 거리에서 잠을 자기도 했던 소년기, 런던에서 희극배우로 데뷔했던 젊은 날, 영화계에 진출해서 떠돌이 캐릭터를 개발하기까지 인간 채플린의 경험은 그 자체가 ‘웃픈’ 드라마다.

자서전에서 채플린은 자신의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이면서 신사이자 시인이고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그리고 남이 자신을 과학자, 음악가, 공작, 폴로 선수로 알아주었으면 하지요.” 채플린의 모습은 필름에 남아 오늘도 우리를 울리고 웃긴다.

신대륙으로 건너가 기회를 잡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갔던 찰리 채플린과 함께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또다른 인물,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생 동갑내기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위공무원이었다. 낙제생인 아들을 엄하고 무섭게 다루었고,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을 감쌌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증오의 폭발이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히틀러는 실업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하고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스스로 화가이자 문필가라고 칭하고 다녔지만 자신의 직업적 실패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과 정신적으로 단절된 채 살았다. 바그너의 장엄한 악극처럼 독일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독일군에 입대하여 1급 철십자장을 받고 제대했다. 그러다 어느 선동가로부터 언론과 자본이 유대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연설을 듣는다. 순간 히틀러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증오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 후 열정적이고 능수능란한 대중연설가로 변신하면서 단 한명의 인간이 인류를 얼마나 황당한 지경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여주기 시작했다.

채플린과 히틀러가 활동했던 20세기 초는 유럽인들에게 롤러코스터 같았다. 산업혁명 이후 압도적인 과학기술과 잉여 생산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그들이 정작 그들의 땅 유럽에서 자멸적인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잿더미로 변하고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식민지들은 잇달아 독립하고 이류라고 깔보았던 미국과 러시아에게 국제질서의 새로운 주역을 양보했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삶은 전쟁과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 군상(群像)을 만화경처럼 보여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동북아시아 정세는 역사적 급경사를 타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 무역 전쟁에, 비핵화 협상에, 바닥을 모르는 청년 실업까지 대한민국은 기회와 좌절의 경계를 따라 탁류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 최전선에 경기도가 있다. 북한 땅과의 접경만이 아니다. 과포화 상태의 거대 도시 서울을 둘러싼 대한민국의 사실상 중심이다. 첨단 제조업 기반이 집중되어 있고 전국의 젊은이들을 빨아들인다. 경기도는 번영일지 몰락일지 모를 미래와의 접경이기도 하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음반 시장 정상에 우뚝 선 것은 그들의 토익 점수가 높아서도 부모님이 부자여서도 아닐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질척거리는 인간 관계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무엇인가에 관심이 많다. 거기에 마음껏 몰입하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순간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형태의 성공을 문득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개성과 트렌드가 다양한 출구를 찾도록 열린 결말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유다.

그들의 ‘덕질’이 혹여 무기력한 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나 무책임한 욜로(YOLO), 또는 반공동체적인 도그마로 흘러가지 않도록 돕는 것 역시 앞선 세대의 몫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 현실과 희망 사이에서 생각의 균형을 잡는 것이 곧 문명화된 자아실현의 기본일 게다. 그로부터 비로소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공익적 가치에 대한 깨달음이 잉태된다.

21세기의 히틀러가 생겨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수많은 채플린들이 생겼으면 한다. 100년 전 채플린보다는 행복하고 의욕 넘치는 채플린이.


정택동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원장,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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