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생가는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121에 위치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향 마을 이름을 평생 아호로 사용했다. 김대중은 1924년 이 터에서 태어나 하의보통학교 3학년 때인 12세까지 살았다. 4학년 때 목포로 이사 가면서 집은 어은리 주민에게 팔렸다. 어은리 주민은 집을 그대로 뜯어서 자기 땅에 옮겨지었다. 생가 터는 마늘밭으로 변했고 그렇게 6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어린소년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됐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마을주민의 대부분인 김해김씨 종친들은 어은리 집을 사들여 생가 터에 원형대로 복원하고 신안군에 기증했다. 한옥은 목재로 맞추기 때문에 원형 복원이 가능하다. 신안군은 대통령의 생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대중은 어린 시절 고향 땅에서 지금처럼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자서전 첫머리에 아버지는 부인이 두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는 서자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을 때다.

필자가 20여 년 전 하의도를 처음 방문해 길가는 촌로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선영 위치를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그분은 말끝마다 “대중이~ 대중이~” 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호남 가서 ‘김대중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식당에서 쫓겨난다는 유언비어가 있었다. 말이 정답고 친밀하긴 했지만 왠지 대통령을 하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분이 항렬 상 집안의 어른이 되거나 친구일 수 있다. 그분 말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 어머니는 생가 옆 원생가 터에서 술과 음식을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한다. 생가 앞은 염전으로 인파가 북적여서 장사가 잘됐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우리민족은 한(恨)이 많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한은 슬픔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한을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면 큰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본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어린 시절 겪었던 차별과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삶이 곤궁했던 소년이 세계적 인물로 성장한 배경 일부를 생가 터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하의도(荷衣島)는 ‘하’자가 연꽃이란 뜻이고, ‘의’는 옷으로 싸다는 의미이므로 연꽃으로 감싸준 섬이란 뜻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형태를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연화부수형이라고 한다. 지도를 펴놓고 하의도를 보면 주변의 무수한 섬들이 하의도 주변에 떠있다. 신안군은 현재 유인도 76개, 무인도 781개 등 857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 섬들은 화산폭발이나 융기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수면 상승으로 형성된 것이다. 즉 본래는 육지 지형이었는데 낮은 곳이 침수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 속은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연결해주는 산맥이 있다. 풍수에서는 이를 도수맥(渡水脈)이라고 한다. 맥이 물을 건너간다는 뜻이다.

신안군의 대부분의 섬들은 목포 유달산과 무안 승달산에서 맥이 비롯된다. 하의도의 맥은 승달산에서 지도, 병풍도, 매화도, 당사도, 양태도, 안좌도, 장사도, 상태도, 하태도로 이어져 왔다. 하태도에서 하의도로 건너온 맥이 처음으로 망매산(150m)을 세우고, 여기서 섬 전역으로 산줄기가 뻗어나간다. 이중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어은리, 웅곡리, 대리, 후광리로 이어지는 맥 끝자락에 김대중 대통령 생가가 있다. 생가 뒤의 나지막한 언덕이 망매산에서 이어져 온 맥이다. 이를 통해 무안 승달산의 정기가 이곳까지 전달 된 것이다.



생가 뒤의 능선은 미인의 눈썹처럼 생겼고, 굽은 듯 생가 터를 안아주고 있다. 좌청룡은 원생가터가 있는 능선으로 북쪽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준다. 우백호는 원을 그리듯 생가를 감싸며 보국을 형성했다. 백호의 산들은 순하지만 그 모양은 반듯반듯하다. 마치 대통령 앞에 장관과 참모들이 도열한 모습이다. 앞의 들판은 본래 염전이었던 만큼 평탄하고 원만하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으니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배출된 것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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