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부터 여름으로 이어지는 전반기는 수많은 기념일로 가득 차 있다. 5월은 첫날부터 끝날 까지 기념일이고, 그 외 상업적인 배경 하에 주로 젊은 연인들을 대상으로 매월 14일마다 이어지는 기념일도 있다. 그렇게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념일만 아니라 ‘내 삶의 기념일’도 있다. 기념일 최고의 선물은 단연 꽃이다. 봄부터 여름으로 이어지는 계절에 꽃이 많이 피는 것은 어쩌면 ‘신의 선물’이다. 이를테면 봄은 바람꽃과 함께 온다. 이른 봄, 아직 차가운 바람 속에서 면류관을 닮은 꽃이 피는데, 그게 바람꽃이다. 봄의 여신 글로리스의 남편인 제피로스가 사랑한 여인이 아네모네였단다. 질투에 눈이 먼 글로리스가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훗날 ‘속절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바람꽃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천경자 작가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수국은 겹꽃이 화관모양을 한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핀다. 어떤 땅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색이 다른데 이 중 파란 수국의 꽃말은 ‘진심’이다. 그리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진심을 안은 신부’가 되고 싶다는 어느 소설가는 그래서 여름이 오면 하얀 원피스를 입고 꽃집에 들러 선명한 청색이 손톱 끝까지 물들일 수국을 한 아름 산단다. 하얗게 피다 노랗게 바뀌는 꽃, 중국에서는 금은화로 불리는 인동초는 한 줄기에서 하얀 꽃과 노란 꽃이 함께 핀다. 핀 모습이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함께 목에 건 2관왕 같아 보이는 금은화의 꽃말은 사랑의 굴레! 꽃을 보고 꽃말을 떠올리면 기막히게 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고개를 숙인 다소곳한 형상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녀를 닮은 윤판나물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이다. 한 여행가는 그래서 윤판나물을 ‘그녀’라고 부른다. 김제동이 말해 유명해진 꽃말도 있다. ‘행운’이라는 꽃말의 네잎클로버를 따기 위해 수없이 짓밟아온 세잎클로버가 그것이다.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15억 중국인이 차(茶)와 향료로 애용하는 자스민의 꽃말은 ‘신의 선물’이다. 튀니지로부터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로 이어지고 있는 혁명의 파도를 ‘자스민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튀니지의 국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 1위는 지난 20년간 변함없이 장미였다. 2위는 프리지아, 3위는 국화. 각각의 꽃말은 색깔마다 다르긴 해도 사랑, 순결, 성실로 대표된다. 올 봄 한번쯤은 먹었을 냉이의 꽃말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친다”이고, 키우기 힘든 난초는 ‘청초한 아름다움’, 요즘 많이 피는 아카시아는 ‘비밀스런 사랑’이란 꽃말을 갖고 있다. 물론 꽃말이 적절하지 않은 것도 있다. 길가에 수줍게 핀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 사실 얼레지는 여느 야생화와 달리 싹을 틔워 꽃을 피우기까지 6-7년이 걸리는 인고(忍苦)의 여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에게 휴가만큼 중요한 것은 꽃이다. 꽃이 꽂혀 있지 않은 집에 사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17-8세기에는 꽃에 담긴 꽃말을 외우는 것이 여자들의 기본 소양이었단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아가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후 강가를 떠내려가는 그녀 주변으로 온갖 꽃들이 피었던 것은 다양한 꽃말로 죽음을 애도하는 예술적 표현이었다. 본디 꽃말이란 ‘문자나 음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꽃에 담긴 의미와 상징을 통해 상대에게 자신의 생각을 암묵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한 도서평론가에 따르면 꽃말은 ‘압축파일’이다. 풀어내기 전까지는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러나 풀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풀어내기 전까지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올 여름 의미 있는 꽃말을 담은 꽃 한 송이 들고 평소 관심 있었으나 찾지 못했던 누군가를 찾아 그 사람의 꽃말을 풀어보는 건 어떨까.

오현철 성결대학교 교수·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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