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나오미 울프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여성문제에 대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유를 권력과 연결시켜 바라보면서, 아름다움과 권력이 대칭적인 비례관계가 아닌, 비대칭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파악한다. 즉, 아름다움의 신화는 여성이 투입하는 에너지를 체로 걸러 권력구조에 맞는 것만 골라내기 위해서 그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변압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권력의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갈등의 예는 역사상으로나 현재 상황으로나 무수히 많다. 가까이는 한동안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게 한 미투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한 유명 방송의 앵커가 성추문으로 도중하차하는가 하면, 같은 방송의 전직 앵커인 유명인이 동료 기자였던 여성에 의해 과거의 성추행 사실이 폭로되면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력 정치인 및 연예인이 연루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관련 사건들이 연일 보도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것이다. 한 인간의 타인에 대한 폭력은 그것이 폭력임을 모르면서 저질러질 때 극대화된다. 잠시 과거로 되돌아가보면 술자리에서의 음주 강요, 노래방에서의 신체 접촉 등 소위 성희롱 내지 성추행에 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남들에게 이야기하기에는 왠지 부끄럽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어서 쉬쉬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부끄러운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건 무엇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사회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랄 때 그 어떤 부끄러움이나 괴로움도 무릅쓸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 상대방을 벌주기보다는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기 위한 경우가 상당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상대방이 사무치게 미워서 어떻게든 혼내주고 싶다거나, 과거의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설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무릇 선의로 시작된 행위가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오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본다.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지엽적인, 말초적인 자극으로 이어지는 신상 털기와 여론의 뭇매에 따른 극단적인 선택 등의 부작용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

폭력성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면, 다수의 약자가 소수의 강자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도 폭력이 개입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미디어의 선정적 보도에 따른 명예훼손을 비롯해서 익명성에 숨은 각종 일탈 행위들도 크게 보면 폭력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이 시대의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양성의 평등과 행복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새로운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지금은 진정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미투.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도 그래’로 읽히는 이 말이, 용어 자체에서부터 왠지 그냥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서양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충분히 과거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 권력자들에게 경종을 울린 측면이 있지만, 일시적인 유행이나 경향에 그칠 수도 있다고 보면, 거기에 무조건적으로 편승하기보다는 보다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문화운동을 독자적으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함께’라든가, ‘나는 이렇게’라든가 하는 주제어를 가지고 새로운 사회물결을 주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것은 나오미 울프가 갈파했듯이, 이제는 여성을 수용할 수 있도록 기계를 바꾸는 일을 해보는 것과도 연결될 것이다.

김향숙 경기도여성비전센터 소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