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경기만의 바다 속에는 19세기 역사가 수장돼 있다

▲ 청일전쟁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다.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환경으로 인해 서해, 그중에서도 경기만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반도의 지형은 높은 산맥이 동해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뻗어져 있고 서해안을 따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중국은 서쪽이 높은 고원 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동쪽으로 평지가 발달해 있다. 한국과 중국 모두 서해 쪽으로 열려 있어서 서해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를 이어주는 통로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높은 산맥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태평양 연안으로 열려 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동해 연안에는 항만이 발달하지 않았고 인구도 많지 않았으며, 동해는 한일 양국 사이의 통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본 열도 중 한반도를 향해 열려 있는 곳은 남쪽의 규수 지방이다. 그래서 한일 간의 통로는 대한 해협이었고 한반도의 남해안이 교역로였다.


▲ 고승호를 침몰시킨 나니와호


19세기 경기만은 제국의 침략 통로였다.

경기만은 서해 중부에 위치한 바다로 한반도에서 해상 활동이 가장 완성하게 이뤄진 곳이다. 경기만은 직항로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에는 경기만에 위치한 당성이 중국과의 주요한 교역 창구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가 경기만에 있어서 고려시대 외국의 배가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바다가 경기만이다. 조선시대 경기만은 왕도인 한양과 한강으로 연결돼 있기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이 빈번하게 출입해 한국 역사 전 시기에 걸쳐 경기만은 왕성한 해양 활동이 이뤄진 바다였다.

육지에도 길이 있듯이 바다에도 항로가 있다. 경기만은 북쪽으로는 장연 반도가, 남쪽으로는 남양만과 그 안쪽으로 아산만이 있는데, 해안선이 복잡하고 바다에는 퇴적물이 쌓여 있어 수심이 얕아 해안선에서 수십 km 앞바다까지 수심은 50m 미만이다. 그래서 비교적 규모가 큰 배들은 수심이 얕은 경기만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 풍도해전에 서침몰되는 고승호를 그린 일본 삽화

큰 배들이 경기만을 드나들 수 있는 항로는 풍도와 팔미도로 연결되는 해역이다. 이 해역은 수심이 깊기에 19세기 후반 제국의 군대들이 조선을 침략할 때 이 항로를 이용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대원군을 납치한 청나라의 함선도 마산포에서 떨어진 먼 바다에 정박해 있다가 대원군이 마산포에 도착하자 배에 태우고 이 항로를 따라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충청도 아산만을 통해 일본군을 한반도에 상륙시켰다. 아산만으로 가기 위해서는 풍도 인근 해역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청일전쟁이 시작된 해전이 풍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것이다. 1904년 노일전쟁 당시 러시아 군대와 일본 해군 간의 해전이 팔미도 인근 해역에서 펼쳐진 것도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바다는 2중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강력할 때 바다는 해외 진출 통로가 되고 약할 때는 침략의 통로가 된다. 바다는 변화가 없는데 육지의 변화에 따라 바다도 변하는 것이다. 개방적인 국가였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바다가 문명의 통로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해금정책으로 인해 바닷길은 막혔고, 이 바닷길을 강제로 연 것은 제국의 상인과 군대였다.


▲ 풍도해전에서 침몰되는 고승호


경기만 바다 속에는 1994년 침몰된 청나라 해군 고승호가 지금도 수장돼 있다

19세기 후반 경기만은 조선이 아니라 제국의 바다가 됐다. 경기만은 조선의 해군이 아니라 제국의 해군이 장악했고 그들 간에 해전이 펼쳐졌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노일전쟁이 그것이다. 당시 치열한 해전이 펼쳐지면서 제국의 군함이 경기만에 침몰했다. 경기만의 바닷속에는 그 잔해가 남아 있다. 경기만은 조선을 침략한 제국 해군의 무덤이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의 개막을 알리는 풍도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해군 순양함 나니와호는 풍도 앞바다에사 청나라 해군의 제원호, 광을호를 만나 공격을 했다. 제원호와 광을호가 도망을 치자 추격전을 펼치던 중 덕적도 해상에서 고승호를 만난다. 나니아호는 고승호에 포격을 가해 고승호를 침몰시켰다. 고승호는 영국 국적의 2천134t급 선박인데 청나라에 임대돼 청나라 군인 1천200여 명을 태우고 아산만으로 항해 중이었다.

고승호에는 야포 12문과 많은 양의 군자금이 실려 있었다. 고승호에 탑승한 청나라 해군은 모두 물에 빠졌고 일본 해군은 이들에게 총격을 가해 청나라 군인을 수장시켰다. 이때 일본 해군은 고승호의 백인 승무원은 구조를 했는데, 이는 일본 해군이 바다에 빠진 청나라 군인을 식별해 잔인하게 조준 사살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2001년 한 업체가 옹진군 덕적면 울도 남방 2km 지점의 해저 20m에서 고승호가 수장된 것을 확인하고 고승호에 매장된 유물을 발굴해 수습했다. 이때 총기류, 탄알, 점화장치, 쌍안경, 선박용 온도계 및 전등, 청룡도, 반월도, 군인 가죽 신발, 도자기류, 철종, 엽전 등 유물 2천여 점이 수습됐다. 이 유물은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으며, 2015년 ‘고승호 끝나지 않은 항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시를 하면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그러나 고승호는 지금도 경기만 바다에 수몰돼 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당시 팔미도 해역에서 고승호를 침몰시킨 나니와호가 러시아 해군 함선을 기다리고 있다가 포격을 가했다. 팔미도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러시아 해군 포함 코레이츠호와 순양함 바리야크호, 그리고 러시아 상선 순가리호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고승호에서 건진 멕시코은화, 실탄, 중국 화폐

러시아 루든 예프 함장은 항복을 거부하고 함선을 모두 수장시켰다. 포함 코레이츠호는 폭파시켰고, 순양함 바리야크호는 배수문을 열어 침몰했으며, 러시아 상선 순가리호는 불을 질러 수장시켰다. 러시아 함선에는 690명의 해군 장병이 타고 있었다. 40여 명 전사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인근 해역에 있던 프랑스 파스칼호와 영국의 탈보트호, 그리고 이탈리아 선박이 바다에 빠진 러시아 장병을 구조해, 러시아로 귀국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당시 일본은 이들을 일본군에 넘기라고 했으나 유럽 선박의 선장들은 거부했다.

종전 후 바리야크호는 인양돼 연습함으로 사용됐고 코레이즈호는 고철로 불하됐다. 수장된 러시아 함선에서 러시아 전투함 깃발, 러시아 국기, 해군 승조원이 사용한 러시아 제 소총, 포탄과 포탄피, 구명정을 내리거나 화물칸에서 작은 화물을 끌어올릴 때 사용한 도르래 등 다수의 유물이 수습됐다. 이 유물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전시 중이다.


▲ 침몰된 러시아함선 바라야크호에서 사용한 포탄


청나라와 러시아 함선의 유물은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는 유물이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은 19세기 조선의 운명을 가른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보다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게 됐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조선의 조정은 그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끌어들였는데, 이제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다.

1905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조선에서 열강 중 가장 우월한 입지를 확보했다.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고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경기만의 바닥에 수장된 청나라와 러시아의 해군은 조선에 대한 그들의 침략 야욕을 실현하려다가 그들보다 더 강한 일본 해군에 패해 수장됐다. 2013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인천을 방문해 러시아 정부를 대표해 노일전쟁 당시 침몰된 바리야크호와 코레이츠호의 전사한 승무원을 추모했다.

▲ 고승호 유물

이제 노일전쟁이 발발한지 100년도 더 지났고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체결했으며, 한국의 국력이 19세기와는 달리 강대해져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조선을 침략하려다가 전사한 러시아 군인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인천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그리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전사한 러시아 해군 전사자 추모비에도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 주민이 감사하다는 증표로 보내온 추모비라는 모호한 설명이 들어 있다.

조선의 바다인 경기만에서 수습된 청나라와 러시아 함선의 유물, 그리고 인천에 세워져 있는 러시아 해군 추모비는 19세기 조선이 조선의 바다도 지키지 못했음을 지금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교훈을 주는 역사적 유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진갑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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