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보훈의 달이다. 계절의 순환이 너무 빠른 것처럼, 국내 정세(政勢)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상처, 갈등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신뢰와 화해의 상징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2018년 4월 27일 오전9시 29분. 군사분계선 MDL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남북 정상간의 악수는 순간이었지만 맞잡은 두 손은 한반도의 겹겹이 쌓인 대결을 밀어내고 새로운 시작의 발걸음을 뗐다.

두 발걸음이 민족의 분단과 갈등의 상징인 휴전선을 걷어내고, 세계평화의 랜드마크로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70여년의 분단의 선을 넘어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세계인의 이목(耳目)이 집중되었던 판문점의 유래를 살펴보자.

널 판(板) 문 문(門) 가게 점(店)은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부터 정전(停戰)회담이 열리면서 회담에 참가한 중공군이 회담장 옆에 있던 초가집 대문 주막(酒幕)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미국 유럽 종군기자들은 이곳 네 채의 초가집들을 헛간이라 불렀다고 한다. 판문점 서쪽 사천(沙川)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옛이름도 널문다리였다. 그 해 8~9월에는 한 달에 걸쳐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판문점 교환 당시 이 다리를 건너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미군이 붙인 새 이름이었다.

판문점은 서울 서북쪽48km 개성 동쪽10km 지점에 있으며, 북한 행정구역은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리에 해당하며 남쪽으로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 JSA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후 유엔과 북한 측 공동경비구역으로 정해진 구역이다. 공동경비구역내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이 있다.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내에 놓여있는 장방형 회의용 탁자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마이크선과 탁자 위에 놓여있는 유엔기와 북한의 깃발로 상징된다. 판문점 공동구역 남측 지역에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있으며, 자유의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1.8km 떨어진 비무장지대 북쪽구역에는 기정동 마을이 있다. 판문점은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 예비 회담을 계기로 군사 정전위원회의 회담 장소뿐 아니라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을 왕래하는 통과 지점으로 활용되어 왔다. 냉전의 최전방에서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지면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968년 미국 정보통신군함 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이 있었으며, 1976년 도끼만행사건 등의 발생지여서 판문점 하면 긴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판문점은 남북 갈등 분위기 속에서도, 만남의 장소가 돼 진실한 대화를 통해 점차 바뀌었다. 1985년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은 민간차원의 첫 판문점 통과 기록을 남겼다. 1998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 떼 1천 마리를 몰고 북한 방문길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의 땅, 예전에 그랬듯이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곳. 만남의 주막집이 판문점으로 변한 지금 관심과 진정성이 요구된다. 만남과 대화가 없던 그 곳 판문점이 다시 관심의 주목을 받으며 평화의 집에서 첫 정상회담을 했다. 그 후 30분간 도보 다리 벤치 회담도 이어졌다. 새들도 자유롭게 남북을 오고가는 하늘색 다리 위에서 두 정상은 은은한 새 울음 음악의 흐름속에 밀담을 나눴다. 옛 친척을 만나듯 평화의 집 회담은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 속이었다. 웃으며 정담을 눴던 두 정상의 미소가 남북평화통일로 이어졌으면 한다.

이명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조사위원협의회 인천경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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