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는 혼자 쓸 수 있는 작은 삽보다 자루가 2~3배나 긴 삽이다. 삽 양쪽 끝에 동아줄을 묶어 셋 또는 다섯이 하나가 돼 작업하는 농기구로써, 혼자서 할 수 없는 삽질을 거뜬히 하는 효과적인 농기구다. 혼자 잘한다 해도 셋이 힘을 합하지 않으면 절대로 성과를 낼 수 없는 도구로, 새마을운동 초기에는 이 도구가 마을길을 넓히고, 무너진 제방을 쌓는 데 참으로 큰 공을 세웠다.

가래보다 유용한 한 수 위의 기구는 ‘손수레’였다. 잔뜩 짐을 싣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면 혼자서 할 때보다 몇 배나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는 새마을정신 중 ‘협동’의 상징과 같다. 새마을운동은 개인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마을 주민전체가 힘을 합해서 새로운 환경과 성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농기계가 부족하던 그 시절에 ‘손수레와 가래’는 새마을 현장의 일등공신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과도 닮아 있어, 새마을운동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말부터 1997년 말까지 ‘고난의 행군’이 계속됐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새마을은 1998년부터 인도적 차원에서의 영·유아 아사자를 막기 위한 영양공급원으로 ‘젖 염소 보내기 사업’을 필두로 대북지원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의류, 감귤 보내기’ 등의 인도적 지원이 이뤄지기도 했다. 새마을은 인도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근본적 문제 개선이 어렵다고 내다봤다. 이에 ‘북한농촌현대화 지원사업’을 추진키로 하고 전국 새마을 지도자들이 12억여 원의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북한에서의 새마을운동은 사유지가 없고 주민의 자발성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우리 방식으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 훗날 통일시대를 대비한 미래사업으로써 ‘북한 농촌 현대화 지원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 첫 사업이 새마을운동의 상징물인 ‘손수레’를 보내는 것이었다. 북한의 농촌 환경에 맞게 국내에서 제작·이송해 북한 곳곳에서 다양하게 활용됐다. 그 이름이 바로 ‘통일손수레’인 것이다. 피폐된 북한 농촌 복구지원을 위한 이 사업은 손수레 앞면과 뒷면에 새마을 마크와 ‘통일손수레’라고 써서 보내졌는데 초기에는 북한 측에서 일부 손수레에 새겨진 글씨와 마크를 지웠다. 이후 페인트 값과 일손이 많이 들어 결국 그냥 쓰게 됐다. 통일손수레는 비정치적이면서도 집단농장 등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 측 반응도 매우 좋았다.

통일손수레 지원사업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 2만4천500대를 보내 평양시, 황해남북도, 평안남도 등 4개 도 8개 시·군에 배포, 활용됐다. 북한 측은 손수레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좋은 반응을 보였다. 우리 측의 자금사정과 운송애로로 중국산을 보내자 북한 측이 “1륜 손수레가 유용하고 중국산은 잘 파손되니 국산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 결국 국산을 추가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통일손수레를 통해 북한 농촌재건 지원의 신뢰를 쌓으며 남북한 간 관계가 두터워지고 북한 측에는 깊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금 사정,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결국 사업이 중단, 남북관계에 있어 매우 안타까운 일로 남았다.

최근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해빙모드로 접어들면서 새마을 가족들은 잊혀져가던 통일손수레를 새삼 기억하게 된다. 지나온 50년, 새마을운동이 대한민국 발전의 밑바탕이 됐다면 다가오는 50년은 통일손수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에서의 새마을운동이 활활 타올라 민족융성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함옥생 경기도새마을회장 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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