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부모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묘봉리 산156-1에 위치한다. 제7대(1971), 제13대(1987), 제14대(1992) 대선에서 계속 실패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수단으로 풍수를 이용한 것 같다. 당시 유명한 지관이었던 육관 손석우씨에게 부탁하여 자리를 잡았다. 손석우씨는 이곳을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는 천선하강형(天仙下降形) 명당이라고 소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하의도에 있는 아버지 김운식 묘와 포천 천주교공원묘지에 있던 어머니 장수금 묘를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그리고 거주지도 33년간 살았던 동교동을 떠나 일산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였다. 


이장하고 1년 반 후 드디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이곳을 제왕지지라며 대서특필하였다. 또한 정치권에서는 풍수 열풍이 일어났다. 특히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은 조상 묘를 이장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그즈음 김종필 자민련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한화갑 민주당 상임고문,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 민주당 이인제 고문 등이 조상 묘를 이장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김종필 총재는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소추안을 주도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그해 제17대 총선에서 4석 밖에 얻지 못했다. 비례대표 1번인 자신이 정당득표율 3%에 미달해 낙선하자, 이 충격으로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정치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이회창은 세 번에 걸쳐 대선에 도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들 정치인들의 조상 묘는 새로 이장한 자리보다 이전 자리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발복으로 대선 주자 위치까지 올랐다고 본다. 풍수에서는 욕심은 금물이다. 차라리 그대로 놔두었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 부모 묘도 제왕을 배출할 만큼의 대혈지는 아니라고 본다. 이곳 주룡은 한남정맥 문수봉(404.8m)에서 쌍용산(213m)과 미리내고개를 넘어 묘봉(228.6m) 쪽으로 가는 맥에서 갈라져 나왔다. 묘 뒤 현무봉까지 오는 맥은 기세가 넘친다. 그러나 현무봉에서 힘 있는 맥은 중리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김대중 대통령 부모 묘 쪽으로는 작은 능선이 하나가 내려올 뿐이다. 이를 풍수에서는 요도지각이라 하며, 주룡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대체로 요도지각과 같은 작은 능선에서는 혈을 맺기 어렵다. 그러나 맥이 살아 있고, 기를 모을 수 있다면 소혈은 맺을 수 있다. 이곳의 맥이 살아 있다고 보는 것은 현무봉에서 묘역까지 내려오는 능선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기가 모였다고 보는 것은 묘역 바로 뒤 능선이 목처럼 잘록하기 때문이다. 이를 결인속기라고 하는데, 그곳을 묶으면 묘역 쪽으로 기가 모이게 된다.


묘에서 주변 산세를 살피면 좌청룡은 이곳을 향해 있다. 그러나 백호는 이곳을 향하지 않고 비주하며 나간다. 앞산 역시 큰 줄기는 감싸주지만 거기서 뻗은 지각들은 외면하고 있다. 제왕지지에서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역 산세의 중심은 중리마을이다. 마을 뒤편에는 임경업 장군의 선조인 임인산의 묘가 있다. 마치 종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 복종형 혈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모 묘를 제왕지지로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생가와 선영과 부모 묘를 종합해서 판단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하의도의 생가와 고조모 묘의 발복으로 큰 인물로 태어난 것 같다. 반면에 부친 묘와 포천 천주교공원묘지에 있었던 어머니 묘가 좋지 않아서 낙선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나서는 나쁜 기운은 차단되고, 작지만 좋은 기운이 더해지니 당선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부모 묘 아래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첫 부인이자 김홍일·김홍업의 친모인 차용애 여사 묘가 있다. 옆에는 김대중과 이희호 여사가 묻힐 자리도 마련해놓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므로 빈자리가 될 것 같다. 차용애 여사 묘 아래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누이 묘가 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