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신들의 땅이라 불렸던 코카서스의 만년설 아래 신비를 간직한 나라, ‘조지아’에 발을 디딘 지 오늘로 일주일째다. 몇 해 전, 아드리아 해를 끼고 시작했던 ‘발칸반도’ 백패킹의 감흥이 엊그제 같은데, 또 다른 세계를 접하니 기대와 호기심은 쉴 겨를이 없다. 더구나 이번엔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즐거움이 배가된 데다 현지 베테랑 가이드의 폭넓은 세계사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입담으로 연이어 웃음보를 더하니 홀로 한 달여 나름 고독한 장정(長程)이었던 지난 여정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므츠헤타’를 거쳐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깃든 ‘카즈베기 산’까지 올랐다가, 오늘 다시 수도인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가고 오는 길 이국의 자연 풍광도 아름다웠지만 예전에 우리도 가졌던 쾌청한 하늘과 맑은 공기가 특히나 부러웠다. 오래전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므츠헤타’엔 예수의 성의를 묻은 자리 위에 세워진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을 비롯한 오래된 수도원과 성채, 성당들이 즐비하다. 또한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된 신선한 식재료 덕인지 러시아의 유명 셰프들 중엔 유난히 조지아 출신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이를테면 포도나무 장작불 돼지고기 꼬치요리인 ‘므츠와디’ 같은 전통요리에다 조지아 전통 와인과의 멋진 궁합을 즐겨보는 것 또한 코카서스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고 보니 인류 최초로 와인을 빚었다는 조지아 사람들의 와인에 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누군가에게 조지아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와인, 믿음, 자연’ 세 가지를 꼽으며 와인을 맨 앞에 놓았다. 8천 년 역사의 조지아 와인의 최대 산지인 동부 카헤티 주의 전통 와인 주조법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다. 그래서 중세도시 ‘시그나기’에서의 와이너리 체험은 더욱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듯하다. 우선 와인의 제조방식이 특별하다. 과육은 물론 줄기, 씨, 껍질을 모두 ‘크베브리’라 불리는 달걀 모양의 항아리에다 넣고 밀봉하여 마치 우리가 겨울 김장김치를 땅속에 묻은 채 숙성의 과정을 거치듯 5,6개월 정도의 숙성과정을 거쳐 빚어낸다. 와인의 전문지식에 문외한인 나는 그저 얻어들은 지식으로 ‘보르도’와 ‘부르고뉴’가 제일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조지아의 전통 와인을 맛보고선 와인에 등급을 매긴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원료인 포도를 키워준 조지아의 토양과 햇빛, 그리고 코카서스의 바람을 어렵잖게 상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각각의 와인은 그 술이 온 고향의 특별한 자연의 맛을 품고 있을 테고 그런 상상을 하며 와인을 즐긴다면 세상에 나쁜 와인은 없을 것 같다.

터키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이란 제목의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할머니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오스만 제국 하렘에 키가 크고 아름다운 처녀를 보냈던 코카서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말은 곧, 수 세기 동안 위세를 떨치던 오스만 제국 시절, 주변의 약소국이었던 조지아도, 조선이 명나라에 바쳤던 처녀 진헌(進獻)과 같은 슬픈 역사를 지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오랜 세월 고난과 슬픔을 지닌 조지아의 모습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쿠라강 언덕 위 올드타운의 허름한 바의 테라스에 앉아 내려다보는 트빌리시의 아름다운 야경, 그리고 금방이라도 프로메테우스가 걸어내려 올 것만 같았던 저 카즈베기 산의 몽환적인 새벽 안개가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며 나더러 여기 한번 주저앉아 살아보라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 타지에서의 ‘한 달 살기’를 위해 굳이 13월을 꿈꿀 필요도 없는 은퇴자가 아닌가! 요즘 유행하는 ‘제주도 한 달 살기’가 아니라 ‘조지아 일 년 살기’에 한 번 도전해 볼까? 시그나기의 절벽 위 성루에서 멀리 코카서스 설산을 마주할 때 뛰었던 가슴이 또다시 쿵쾅거린다. 아직도 철이 덜 든 겐가?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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