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했다. 이후 우리가 염원하던 광복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북한은 소련군, 남한은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48년 북쪽은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한 나라 안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남북 간 이념적 대립은 냉전의 갈등을 깊어지게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 북한은 ‘폭풍’이라는 암호명으로 기습적으로 남침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한 것이다. 기습을 받은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전쟁 사흘 만에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에게 넘어갔다. 열세에 놓이게 된 남한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UN군의 지원을 받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했다.

마침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 전세(戰勢)를 역전시킨 연합군은 38선을 돌파하고 평양을 탈환한 뒤 압록강 국경(國境)지대까지 이르렀다. 남한의 승리로 전쟁의 끝이 보일 때 갑자기 92만 명의 중공군이 물밀 듯이 압록강을 건너와 전쟁에 개입했다.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후퇴와 반격이 반복되었다. 휴전회담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停戰)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폐허가 되고 전사(戰死)한 한국군 수는 무려 15만7천899명, 부상자는 45만742명, 실종까지 포함하면 한국군 피해 수만 62만 명에 달한다. 미군은 3만6천574명이 전사했으며, 10만3천284명이 부상 당하고 3천737명이 실종되었다. 영국은 1천78명 전사, 2천674명 부상 등 UN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총성이 멎은 지 65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유엔 참전용사 추모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도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사자와 실종자들의 유해 발굴과 송환이 신속하고 온전하게 이뤄지도록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화를 지켜 낼 수 있었고 오늘의 발전을 이뤄냈다”며 “참전용사 분들의 희생과 헌신은 제 삶에도 남아있다”고 밝혔다. 또한 “1950년 겨울 장진호 용사들의 영웅적인 전투로 흥남 철수 작전이 성공했고 그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피난민 중 저의 부모님도 계셨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유엔 참전 용사 한 분 한 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기억할 것이다. 가족과 후손들이 그 자부심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6.12 북미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한국전쟁 참전 미군 병사들의 유해 송환 절차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북한이 수일 내에 6.25 전쟁 실종된 미군을 포함한 병사들의 유해 최대 200구를 송환한다고 한다. 현재 북한 땅에 묻혀 있는 유해가 5천300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군 유해 송환도 중요하지만 북한 어느 산하(山河)에 묻혀 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유해 발굴도 빨리 이루어져 그리운 가족품에 안겨주어야 한다. 유해 발굴 논의는 과거 2007년 11월 국방장관 회담 때도 합의한바 있으나 실제 이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은 과거와 다르다는 평가다. 모처럼 남북 관계가 전례 없는 대 전환을 맞이하면서 전쟁의 불안이 감돌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定着)되길 기대해 본다.

이명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협의회인천경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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