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고지(高地)에서 탄약과 식량을 비롯한 군수 물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힘겹게 노동을 해야 했던 노무부대원들을 아는가. 그들은 계급장도, 군번도 없었고, 산에서 내려올 때는 전사한 시체나 부상자를 지고 내려왔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전투지원 병력이었다. 이들은 전장(戰場)에서 총을 잡는 대신 지게를 짊어졌다. 45kg이 넘는 군 보급품을 등에 메고 높은 산봉우리까지 매일 10km의 산비탈을 돌아 참호(塹壕)까지 몇 차례씩 오르내렸다. 병사(兵士)들에겐 노무부대보다 지게부대로 알려져 있다. 노무부대는 1950년 7월 26일 미8군 사령관인 윌턴워커 중장의 긴급지원 요청에 따라 창설되었다. 최초에는 민간인 수송단 또는 운송단인 ‘C.T.C.(Civilian Transportion Corps)’로 불리었으며, 우리나라 전통 운반수단인 지게가 알파벳 ‘A’와 비슷하다고 ‘A.Frame.Army’로 불리었다. 이들은 국가 긴급동원령에 따라 노무부대로 편성, 30~40대 중 징집 혹은 자원한 민간인으로 구성됐다. 국제 연합군은 1951년 5월 한국 근무단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은 노무부대를 미8군 예하 지원단으로 재편성하고, 부대는 3개 사단과 2개 여단으로 점차 증편되었다. 노무부대, 즉 지게부대는 1953년 휴전 때까지 유엔군에 의해 운용됐다. 그 수만해도 직접고용 노무자 7만여 명, 계약고용 노무자 2만 여 명, 기타 기관의 노무자는 1만3천 명에 이른다. 노무부대원들은 철모는커녕 군복도 없었다. 겨울에는 솜바지 저고리, 여름에는 하얀 무명바지 적삼을 입었다. 북한군의 눈에 잘 띄는 복장 때문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비록 나이가 들어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지는 못하지만 맨몸으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우리 조국을 구하기 위해 보급로를 뚫고 군 보급품을 신속히 전달해주었다. 아마 이들이 없었다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량이나 우마차가 지나갈 수 없는 산꼭대기까지 무슨 수로 탄약과 전투 식량을 운반하며 국군과 유엔군이 어떻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을까.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악지역이다. 이 때문에 전투는 더욱 어려웠고, 주로 깊은 산속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때마다 그들에게는 생사를 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 부상자도 있었고 실종된 자도 있었다. 그렇다고 노무자들의 대우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자발적으로 국가의 부름에 자신의 몸을 바쳤으며 ‘위국 헌신’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숨어있는 진정한 전쟁영웅이었다. 6.25전쟁 때 이들이 없었다면 전쟁을 수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적의 포탄에 헬기도 착륙할 수 없는 험준한 산맥에 전투식량과 탄약이 없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이 어떻게 전투를 치를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아찔할 따름이다. 6.25전쟁의 가장 어려운 전투는 노무부대가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공적이 결코 적지 않다. 노무부대는 그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서는 150명이 희생되는 등, 3년간의 전쟁 동안 전사한 노무부대원은 2천 64명, 실종자는 2천448명 그리고 부상자는 4천 282명이나 발생했다. 무려 8천794명의 노무자가 피해를 입었다. 노무부대의 값진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전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투의 절반은 그들이 한 셈이다. 그들은 명예도 바라지 않은 채, 다 떨어진 무명옷과 낡은 지게에 자신의 운명을 의지하며 군번도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만 수행했다. 우리는 잊혀진 그들, 노무부대원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명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협의회인천경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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