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웅(1911~1976)은 한국전쟁 때 남조선미술가동맹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그는 1988년 월북 작가 해금조치 이후 한국근대미술사에 재등장하기 시작한 인물로, 근현대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특별한 존재로 평가받는다. 월북 작가 정현웅은 세상을 어두운 눈길로 보았던 인물이다. 싸늘하고 우울한 색, 불안, 불쾌함이 감도는 어두움은 그의 작품을 평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정현웅은 서울 출생이다. 어린 시절 유난히 병치레가 심했다. 그는 방안구석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공상을 하던 겁 많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경성 제2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했다. 미전을 통해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신문 삽화, 표지화를 비롯해 인쇄출판미술과 비평 활동으로 시각문화의 개척자로 부각되고 있다. 조선, 동아일보사 기자를 거쳐 ‘신천지’ 편집장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언론인으로 각종 출판물의 삽화와 그림책 원화제작 등 다채로운 활약을 했다. 최근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 많은 자료가 발견되어 한국현대만화의 선구자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안악 1∼3호분, 강서대묘, 공민왕릉 등의 고분벽화를 모사하기도 했다.

▲ <정현웅, 대합실 한구석, 1940, 유채>


정현웅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화우들을 마음에 두고 존경했다. 그 중 정현웅이 좋아한 화가는 정종여(鄭鍾汝, 1914~1984)였다. 정종여는 조선화 분야의 대가로, 활달한 필력과 정교한 묘사력이 뛰어난 화가였다. 정현웅이 자신의 집에 정종여의 작품을 걸어 두고 지낼 정도로 그를 아끼고 좋아했다. 두 사람이 각별했던 것은 남녘에 가족을 두고 온 아픔을 함께 한다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대합실 한구석’은 일제의 굴레에서 만주의 북간도로 떠나는 빈민가족의 절망적인 현실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고뇌에 찬 인물과 뒤통수를 째려보는 감시인을 그린 이작품은 식민지 시대 사회현실이 고스란히 그려낸 걸작이다. 정현웅의 인물화는 보편적으로 병든 그림자처럼 어둡고 컴컴한 색이 주를 이룬다. 당시 비평가들에게는 좋은 평은 받지 못했으나, 소박한 사실주의의 전통을 이어가는 인물로 남기는 충분하다. 월북한 뒤 역사화도 그렸다. 1960년대 후반 작품 ‘동학군 고부 해방’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작품들이 원작은 남아 있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선물 같은 작가이다. 공기나 빛처럼 생명을 주는 모든 것들은 다 소리도 형체도 없다고 말한다. 작가의 감정과 사유도 그런 것은 아닐까.

 

 

 

 

 

최경자 화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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