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잡지 '릿터', '여성-서사' 기획…고전 비틀기 시도

한국 근대문학에서 가장 손꼽히는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첨지의 하루를 그린다. 그는 집에 누워 있는 아픈 아내를 놔두고 오랜만에 돈을 좀 벌자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들고 집에 들어간다. 김첨지는 아내에게 폭언과 욕설을 하기도 한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가난과 울분을 묘파한 한국 초기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지만, 지금의 여성주의 시각으로 보면 어떨까. 주인공 아내의 시점으로 본다면 분명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꾸준히 페미니즘 소설을 선보인 김이설 작가가 그런 시도를 했다. '운수 좋은 날'을 '운발 없는 생'이라는 제목으로 비틀어 다시 썼다.

이 소설은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8·9월호에 커버스토리 기획 '여성-서사'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됐다.

"나가기만 하면 술 처먹고 들어오는 주제에, 제 새끼 한번 어를 줄 모르고, 제 새끼 배 채워 주는 나한테는 약 한 첩 쓰는 것도 아까워하는, 저 호로 자식 같은 놈! (중략) 나는 답답했다. 운이 왜 필요한가. 열심히 일하고 착실히 모아 어떻게든 살면 되지. 꼬박꼬박 하루 벌이의 절반이 넘게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주제에, 그마저도 벌이가 적은 날은 옴팡 다 쓰고 들어오기를 예사로 알고, 날씨 탓을 하며 나가지 않는 날이 달에 반은 넘었다. 배곯고선 인력거를 못 끈다며 그마저 없는 세간살이를 팔아서라도 떡이든 곡주든 자기 배는 채우는 인간이었다."" ('운발 없는 생' 중)

이번 기획에는 김보현, 천희란, 손보미 등 여성 작가들이 참여해 고전소설 다시 쓰기를 시도했다.

김보현은 이상의 '날개'를 주인공 화자의 아내 입장에서 다시 썼다. 제목은 '미망기'.

"그는 평생 다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기생인 나와 부부 생활을 설계한 것 역시 그 필사의 노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복잡하게 뻔한 조선의 가장(家長)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뜻밖에도 그에 대한 모함이 되는 것일까? (중략) 천재를 박제해 버린 여인을 아시오? 우선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여 연복케 하여 조금씩 조금씩 죽인 뒤에…. 이런 대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스피린이라고 속인 것은 남편 자신이다." ('미망기' 중)

'릿터' 편집진은 "의도와는 달리, 특정 작품을 여성혐오라 낙인찍는 것 같아 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흠 잡을 곳 없는 소설의 뒤안길에 흠처럼 숨어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독서 경험은 새롭다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첨지의 아내에게 살아 있는 목소리를 부여할 수 있어서 저릿한 다행스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번 기획에는 문학 연구자, 평론가들의 글도 다양하게 실렸다.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여성 문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성차화된 여성 주체의 등장', 문학평론가 조연정의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2018 한국 문학의 여성 서사가 놓인 자리',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칙릿 이후 여성 서사의 풍경',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김지은의 '빨간 모자 소녀가 온다- 그림책과 아동 문학에서 여성 서사의 변화' 등이다.

박혜진은 2000년대 이후 여성 서사를 시간 흐름에 따라 '칙릿 서사'-'反소비 서사'-'사랑의 서사'-'여성혐오 서사'-'워맨스(womance) 서사'로 구분했다. 여성혐오에 대답하는 대표 서사로 '82년생 김지영'을 꼽으며 "의외로 이 소설은 20대들의 공감대를 얻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이들은 양성평등 시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들은 온라인 세계에서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misogyny)를 공기 삼아 살아온 세대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사회에 깔려 있는 여성혐오의 정동을 공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연합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