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 지역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만큼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68년 완공된 환인댐으로 인해 그 대다수가 물에 잠겨버렸다. 당시만 해도 역사유적의 가치를 잘 몰랐을 시기다. 더구나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문화혁명 기간이라 역사와 전통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타파 당하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환인지방을 가더라도 졸본성만 보고 돌아오기 마련이다. 필자의 이번 답사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초기 평지성으로 알려진 하고성자성지(下古城子城址)는 환인시내에서 서북쪽으로 3km 지점인 육도하자향 하고성자촌에 위치하고 있다. 혼강 서쪽 강변에 황토와 진흙을 층층이 다져 쌓는 판축법을 이용한 토성이다. 이는 백제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서울의 풍납토성과 같은 공법이다. 현재는 성벽 대부분이 유실되고 그 바닥면만 남아있는데, 조선족학교 건물 아래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발굴 자료에 의하면 성벽의 길이는 동벽 226m, 서벽 264m, 남벽 212m, 북벽 237m이다. 출토 된 유물은 환두대도, 화살촉, 토기 등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상고성자촌에는 고구려시대의 무덤인 적석묘들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지역을 고구려 초기 평지 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곳을 풍수적으로 살피면 도읍이 위치할 만큼 좋은 터로 보기 어렵다. 우선 뚜렷한 주룡이 없다. 하고성자촌 뒤의 산줄기들은 마치 손가락을 편 것처럼 여러 능선들이 쭉쭉 뻗어 있다. 기가 한쪽으로 모이지 않고 산만하게 펴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룡이 없고 기가 한쪽으로 모이지 않았으니 혈도 있을 수 없다. 주변 산들도 성터를 감싸지 않고 제각각 뻗어 보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보국을 갖추지 못하면 산만하여 사람들이 흩어지기 쉽다. 혼강은 환인시를 태극 모양으로 감싸고 흐른다. 그러므로 그 반대편에 있는 이곳은 혼강의 반배 지역이다. 물이 반배하면 재물을 얻기 힘들뿐만 아니라 강이 범람했을 때 수해를 당하기 쉽다.



따라서 하고성자성은 고구려 왕궁이 있는 평지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을 따라 침략해오는 적군을 막는 보루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강을 따라 교역하는 선박들의 물류기지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는 서울 하남위례성을 지키는 한강변의 옥수동토성, 삼성동토성, 암사동토성과 같은 구조다. 그렇다면 고구려 초기 평지성은 환인시내나 환인댐 수몰지구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야 오녀산성과도 거리가 가까워진다. 하고성자성에서 오녀산까지는 약10km 떨어져 있는데 유사시에 산성으로 피하기는 먼 거리다.

주몽이 졸본에서 자리를 잡자 부여에 남아있던 첫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주몽이 부여를 도망칠 때 칼을 동강 내어 준 반쪽을 가지고 왔다. 주몽이 보관한 다른 반쪽과 맞추어보니 한 칼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한 주몽은 BC 19년(재위 19년) 유리를 태자로, 예씨를 원후, 소서노를 소후로 봉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두 파로 나뉘어졌다. 유리파와 비류·온조파다. 유리를 지지하는 인물은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마리?협보를 비롯한 무장 세력이다. 반면에 비류·온조를 지지하는 파는 소서노와 함께 졸본에 세력기반이 있었던 문관관리들이었다. 하지만 두 파의 대립은 유리파의 승리로 끝난다. 이미 고구려 국정은 주몽이 거의 장악했기 때문이다. 유리가 태자에 책봉되고 5개월 후 주몽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리가 2대 왕으로 즉위했다. 소서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유리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는 두 아들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했다. 결국 그녀는 탁월한 결정을 내린다. 조상대대로 쌓아온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기로 한 것이다. 환인에서 서울은 지금도 먼 거리다. 그 먼 거리를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터를 잡고 온조로 하여금 백제를 건국토록 하였다. 소서노는 우리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두 나라를 건국한 여인이 된 것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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