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식기자/noize75@joongboo.com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47) 대표는 쉴 틈이 없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주노동자들의 상담은 그에게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가 왜 “시간이 없다”며 인터뷰를 주저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김 대표와의 인터뷰는 5~6명의 이주노동자들의 상담 중간 중간 틈틈이 이뤄졌다.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길어졌다. 덕분에 기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손수 만들어 준 이국적인 맛의 콩나물국을 저녁식사로 먹어보는 행운까지 얻었다.

2009년에 문을 연 ‘지구인의 정류장’은 안산 지역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미디어 교육 뿐만 아니라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등 노동 문제 상담도 진행하고 있다. 주중에는 주로 노동 상담이, 주말에는 영화만들기와 사진찍기 등의 문화강좌가 열린다. 지난해 1월 방 3개와 거실을 갖춘 현재의 공간(원곡동 804-2번지 304호)으로 옮기면서 오갈 곳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쉼터 역할까지 하고 있다.

# 지구인의 정류장, 이주노동자들 쉼터로

다큐멘터리 감독이 본업인 김이찬 대표는 최근 몇 년 동안 카메라를 놓고 살았다. 대신 지구인의 정류장을 운영하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상담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현재 지구인의 정류장에는 캄보디아와 네팔 출신의 노동자 20여명이 지내고 있다. 김 대표는 한국어와 캄보디아어를 섞어가며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국적과 피부색 차이에서 오는 위계나 이질감은 없었다. 김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의 맏형 같았고, 지구인의 정류장에 머물고 있는 그들은 ‘지구인’처럼 ‘정류장’의 자장 안에서 안온해 보였다.

이곳을 찾은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임금체불 등의 문제로 전 직장에서 탈출(?)한 상황이었음에도 얼굴 표정이 밝았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동포들을 만나 서로 위안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 대표가 설명했다.

“지구인의 정류장에 처음 들어온 친구들의 얼굴은 대개 어둡죠. 생각해 보십시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것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다가 임금 체불 등 부당한 일을 당하고 갈 곳 없어 이곳을 찾은 건데, 두렵고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한데, 이곳에서 동포들을 만나 서로 정보도 주고받고 의지하다 보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웃음을 되찾더라고요. 저도 저들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거나 하지 않아요. 스스로들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지 논의하는 구조 정도만 마련해 줄 뿐이죠.”

김 대표가 전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고용주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열악했다.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보다 농촌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임금체불과 노동 착취 문제는 농촌이 더 심각했다.

지난 9월 김 대표는 경기도 광주로 찾아가 그곳의 한 농가에서 일하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2명의 사건을 관할 고용센터에 접수시켰다. 당시 김 대표가 만난 고용주는 처음에는 고용센터 핑계를 댔다고 한다. 센터가 작성한 근로계약서와 근로기준법에 그렇게 나와 있다며 떼를 썼다. 그러다 센터 측이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지불해야 된다는 지시를 내리자, 이번에는 기숙사비를 임금에서 떼고 주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 여름 낮에 비닐하우스의 온도는 48도에서 50도까지 오릅니다. 이런 곳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 한 달에 휴일이 2번이라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이 받는 월급은 100만원 수준이에요. 최저임금도 못 받고 있는 것이죠. 이들을 고용하는 한국 분들도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과 정부의 방조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어기고 있는 셈입니다.”

   
 
# “표현하지 못하면 인권도 없어”

김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미디어 교육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표현하지 못하면 인권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무 여건 속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한 까닭일 테니까.

그가 18년 전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를 표현해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었다. 넥타이 메고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것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94년부터 4년동안 케이블방송국 PD 생활을 하면서 ‘서울이야기’라는 B급 SF 연작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저예산인데다 비주류의 감수성을 담은 작품들이라 대중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애착은 깊었다.

그러던 중 다니던 방송국이 홈쇼핑 업체와 통합되면서 종속적인 방송 제작 시스템에 염증을 느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가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가 독립영화였다. 1996년께 디지털 비디오카메라가 등장하고, 영화 만들기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비싼 필름 값 때문에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일정 규모의 자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후 사회운동으로서의 미디어 활용 운동,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에 천착했다. 모국의 민주화 투쟁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미얀마인들의 투쟁과 한국 사회의 냉담을 그린 ‘데모크라시 예더봉’(2000년작) 등 총 5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것도 이러한 노력들의 흔적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제 자신의 한계에 마주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것은 창작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수단의 하나가 카메라인 것이죠.”

#월급 130만원, 그래도 즐겁다

김 대표는 그 사회의 수준은 약한 고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어떠한 배려가 장치돼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우리 사회는 반성할 대목이 많다고 그는 밝힌다. 여전히 노동의 가치는 폄훼되는 경우가 많고, 노동자들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천박한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취약 산업 보호라는 명분으로 시행되고 있는 ‘고용허가제도’ 역시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용허가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주노동자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 기간인 4년10개월 동안 사업장을 세 번만 옮길 수 있다. 더욱이 지난 8월부터는 노동부가 지침을 내려 고용주에게만 구직자 명단을 제공하고, 사업장을 변경하려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구인사업장 명단조차 제공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가운데에서도 그 맨 아래에 이주노동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고용허가제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차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죠. 고용주가 사인을 해주지 않는 이상 이주노동자들은 직장을 옮길 수 없어 미등록자,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정부가 멋모르는 사람들을 제도에 끼워 넣어 불법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죠.”

정작 김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챙기느라 자신의 근무 여건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그를 포함해 두 명의 상근자가 있지만, 130만원 남짓한 월급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 김 대표에게 근무시간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상담이 시작되고, 상담이 끝나야 휴식을 취하고 잠이 드는 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주노동자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행복하냐고. 어차피 남의 일인데 이렇게 고생하면서 도울 필요가 있느냐고.

“사십대 후반의 동년배들과 비교해 보면, 제 삶이 보잘 것 없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국의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웃을 수 있는 기회들을 그들은 갖지 못하잖아요. 캄보디아, 네팔 등지에서 온 젊은이들의 삶의 양식은 단순합니다. 기쁘면 함께 웃고, 슬프면 서로 위로를 나누죠.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니, 저도 그들과 동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해요.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희망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 대기업 부장으로 근무하는 친구 녀석이 부럽지 않습니다.”

김 대표는 이주노동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싫든 좋든 이미 이주노동자들이 이방인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사회에 ‘지구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연대의식을 발휘해 줄 것을 앞으로도 줄기차게 요구해 나갈 계획이다.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