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다시 깃발을 들었다. 대선(大選) 패자(敗者)들이 불과 1년도 안돼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안철수는 새 정치 실현(實現)을, 문재인은 ‘12·19대선’ 단죄(斷罪)를 깃발의 정당성으로 삼았다. 그들의 무대 등장 퍼포먼스는 주거니 받거니다. 미리 짜놓은 한 편의 미(未)완성 각본 같다. 안철수는 문재인의 ‘행동’을, 문재인은 안철수의 ‘생각’을 빌렸다. 지난달 28일, 안철수는 정치 세력화 추진 선언을 통해 미래 권력 쟁탈전의 서막(序幕)을 올렸다. 나흘 뒤인 지난 1일, 문재인은 이른바 ‘문재인 생각’(책명 : 1219, 끝이 시작이다)이란 회고록 비슷한 책 요약본을 공개하며 ‘어게인 2012’의 서곡(序曲)을 울렸다. 안철수는 올랐고, 문재인은 채비를 마친 셈인데, 그들의 재등장 퍼포먼스는 낯익다. 시계추를 작년으로 되돌려 보자. 6월 17일, 문재인은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7월19일, 안철수는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을 통해 권력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주연급 배우의 등장 순서만 달라졌을 뿐, 대강(大綱)은 ‘응답하라 2012’ 예고편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시즌1’을 표절한 ‘시즌2’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쨌든 ‘생각’했던 안철수는 ‘행동’으로, ‘행동’했던 문재인은 ‘생각’으로 패자부활전을 선언했다.

내 나라 근대 정치사를 통틀어 대선 패자가 1년도 안돼 승부수를 빼든 경우는 없다. 패자는 시한부 정치 망명길에 오르거나,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그것이 승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최소한의 정치 도의(道義)였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그랬고, 2002년 ‘병풍(兵風)’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도미(渡美)했던 이회창 전 총재도 그랬다. 김 전 대통령은 2년 반, 이 전 총재는 3년. 두 사람이 자신의 말을 뒤집는 데 걸린 인고(忍苦)의 시간이다.

문·안 두 의원이 예의가 없어서, 도의를 몰라서, 2회초에 자진 등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비벼볼 언덕을 내준 식물정치, 내년 전국선거, 경쟁심, 절박감 등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지난 4월 재보선을 통해 여의도에 입성한 안 의원은 그동안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유의 모호한 화법(話法)과 이른바 ‘훈수정치’는 불확실성만 더 키웠다. 문 의원은 침묵을 깼던 NLL 대화록 정국에서 자살골을 넣었다. 말 바꾸기와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는 후배들의 도전을 불러왔다. 판을 흔들 변화가 필요하던 차에 6·4지방선거가 그들 앞에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다.

이제 관심은 두 의원이 과연 내년 선거에서 안풍(安風)과 문풍(文風)을 다시 일으켜 대세를 잡거나 재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에 모아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올시다다. 안 의원은 “지방선거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겠다”고만 했다. 후보를 내겠다는 것인지, 내지 않겠다는 것인지 여전히 모호하다. 인재 풀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무엇보다 사즉생(死卽生), 생즉사(生卽死)의 결기가 안보인다. 당수(黨首)는 염불을 외는데, 잿밥에만 관심 있어 보이는 경량급 인사 몇몇이 거대 정당에 맞설 수 있는 신당을 몇 개월 안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친박(親朴)연대’ 비슷한 요상한 정치결사체를 만들어 놓고, ‘신당입네’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묻지마 지지’를 보내며 내년 선거에서 안풍이 불어 정치판을 쓸어주길 학수고대하는 지지층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안개당(安個黨)은 오지 않을 것이다.

문 의원 역시 마찬가지다. 일찌감치 차기 대선 출마를 시사한 것은 내년 지방선거를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노림수다. 친노(親盧)의 이탈을 막고 입지를 회복하는 동시에 현 지도부를 무력화시킨 후 당을 뿌리부터 접수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벌써 자가발전할 이유가 없다. 현 지도부의 거듭된 입단속 경고에도 돌출발언이 끊이질 않는 민주당의 속사정을 곱씹어보면 답이 나온다. 문 의원의 궁긍적인 목표는 지방선거를 통한 완벽한 친노의 부활이다. 친노는 4·11총선을 통해 부활에는 성공했지만, 아직도 그림자 한켠에는 폐족(廢族)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친노는 그들만의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중도 성향의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지지자 상당수는 열린우리당 트라우마가 있다. 민주당원들이 친노의 전면 재등장을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감히 예언하는데, 문노당(文盧黨)도 오지 않는다. 

한동훈 정치부장/funfun@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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