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이 시골 면장을 지내셨다. 20여년 전에 퇴직하셨다. 그런데 아직도 마을 주민들은 외삼촌을 ‘면장님’이라고 부른다. 애, 어른 할 것 없다. “에이, 그만둔지 언젠데… 면장은 무슨” 하시면서 손사래를 치시곤 하지만 싫지는 않은 기색이시다. 외삼촌은 영원한 면장이다. 난 초등학생 시절 타의 반 자의 반 외삼촌 집에서 방학을 보내곤 했다. 출가한 여동생에게 자식 걱정 내려놓고 먹고 사는 문제 해결하라는 공무원 오빠의 넉넉한 배려였다. 외삼촌은 매일 꼭두새벽에 출근했다. 날도 밝기 전에 출근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공무원은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직업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외삼촌은 ‘새마을운동가(歌)’ 때문에 새벽 댓바람을 맞으며 출근했던 것 같다. ‘새벽종이 올렸네~’로 시작하는 노래가 아침 6시에 울려퍼지게 하려면 누군가는 5시 59분까지 면사무소에 출근해야 한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면사무소 귀신쯤 되는 외삼촌은 그 일을 당신의 업(業)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수확철이 되면 외삼촌댁에는 시도 때도 없이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다. “갓 뽑아서 싱싱할때 우리 면장님 드셔야 한다”며 배추 한 포기, 파 한단, 마늘 한 접 등등 앞 마당에 놓고 같다. 외숙모가 출타한 날에는 “아랫마을 김 아무개가 전번에 지붕 고쳐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며 따끈따근한 계란 한 판을 툇마루에 올려놨다. 윗마을 뚱뚱이 아주머니는 “법원에 제출할 서류 대신 써줘서 너무너무 감사하다”며 신문지로 꼭꼭 싼 돼지고기 반 근을 들고 오기도 했다. 비 오는 날에는 삽을 챙겨들고 출근했다. 마을에 초상이라도 나면 밤새워 축문을 대신 써줬다. 가방 끈 짧은(고졸) 6급 공무원(면장)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겐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난 외삼촌 영향 탓인지 구질구질한 공무원의 길은 애저녁에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무원을 존경한다. 불량공무원만 빼고.

경기도가 입사 20년차 공무원에게 특별휴가 10일을 주는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10년 전 주 5일 근무제 도입과 함께 폐기됐던 제도를 부활시키겠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요구했고, 사용자가 동의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항변한다. 도대체 누가 노동자고, 누가 사용자란 말인가? 경기도가 이 제도 도입의 근거로 삼는 것은 2012년 7월 19일 체결한 ‘경기도·경기도청 제3차 단체협약서’다. 이 합의서에 이름도 선명한 교섭위원 20명의 신분은 일반직 공무원이다. 굳이 나누자면 부지사를 필두로 한 고위직 공무원 10명은 사측,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하위직 공무원 10명이 노측이다. 합의서에 사인한 노조위원장도 일반직 공무원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만 유일하게 정무직 공무원이다. 공무원끼리 편을 갈라 ‘공짜 휴가’를 챙겨먹는 제도 도입에 합의한 것을 전가의 보도 인양 꺼내든 셈이다.

장기 근속 공무원에게 특별휴가를 주는 제도는 주 5일 근무 시행 전날인 2005년 6월 30일 자정을 기해 폐기된 악법이다. 대통령령에 슬그머니 한 줄 적어놓고 시행하던 이 제도는 합법적인 ‘무노동 유임금’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돼야 한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주면서 밤낮없이 부려먹으려다 보니 선심 쓰듯 만들었던 ‘묻지마 휴가’였기 때문이다. 대통령령에 있던 조문을 들어냈으니 이젠 법적 근거도 없다. 차근차근 따져보고, 집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곧 닥쳐올 것 같아서 여기서 더는 거론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같은 편끼리 편법적으로 ‘공짜 휴가’ 제도를 만들어 놓고도 ‘무노동무임금’을 외칠 것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공무원도 근로자다. 재충전은 필수고, 안식일도 충분조건이다. ‘열심히 일한 그대 떠나라’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구제역 파동때 살아서 펄펄뛰는 돼지 배를 가른 것이 공무원이다. 타미플루 일주일치 먹어가며 AI에 감염된 닭·오리 파묻는 것고 공무원 일이다. 캄캄한 새벽 길 한복판에서 제설작업하는 일도 내 나라 공무원 몫이다. 국가와 국민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말없이 굳은 일 마다하지 않는 조직은 공무원뿐이다. 국가를 지탱하는 보루인 공무원들에게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자는 데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법정 공휴일을 제외하고도 년간 최대 21일까지 쉴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를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연월차 휴가 수당은 따로 챙기면서 ‘공짜 휴가’나 탐하는 몰염치한 조직이 되지 말라는 얘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물러설 기세가 아닌 것 같아서 선전포고한다. 영원한 면장으로 기억될 것인지, 개념없는 공무원으로 기록될 것인지 선택하라.

한동훈 정치부장/funfun@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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