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①다양성과 개방성의 포용, 역동의 경기로

   
▲ 담무갈보살(위)과 지장보살(아래) : 고려 태조가 금강산 정양사에 오르면서 배점(拜岾)에서 절을 올리며 고려의 삼한일통을 기원하자 담무갈보살이 나타나는 모습을 그렸다. 엎드려 예를 취한 인물의 오른쪽에 태조[大祖]라고 쓰여 있다. (1307, 국립중앙박물관)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학예팀장

#6백년을 넘어 천년으로

작년이 되어버린 2014년, ‘정도(定道) 6백년’을 맞아 경기도 6백년의 역사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규명하는 과정과 결과가 여기저기서 이뤄졌다. 사실, 필자가 몸담은 경기문화재단과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이를 위한 작업이 훨씬 그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하나의 압축된 특징으로 규정하기 위한 고민과 토론이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진작부터 ‘경기 6백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를 준비하고 그 중심적인 내용을 정리하면서도 정작 이를 한마디로 규정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전체적으로 훑으면서 6백년 경기도의 역사문화적인 정체성을 ‘조선 근본의 땅(朝鮮根本之地), 경기(京畿)’라고 정리했다. 경기는 조선의 왕화(王化, 왕의 정책)가 우선 실행되었던 곳이어서 왕조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음에서였다.

2015년이 시작됐다. 6백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개념의 설정과 확장된 아이덴티티를 조직하는 작업을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제는 ‘2018, 경기 천년’이다. 이것이 단순히 역사의 소급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지극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 작업은 필요치 않다고 감히 단언한다. 여기에는 그간 역사문화의 회고와 정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재발견과 더 나아가 미래의 지향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경기도의 ‘새천년(New millennium) 2018’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경기문화 원류의 형성

지리적으로 경기도가 우리 역사에서 주요 무대로 등장한 것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였다. 현재의 풍납토성 일대가 그 한성(漢城)으로 비정되는데,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8년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부터 2030여년 전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삼한 중에서 78개의 소국(小國)으로 이뤄져 있던 마한의 몇몇 나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기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5백여년에 조금 못 미친 긴 기간 동안 경기도는 백제의 도읍을 끼고 있었다. 현재의 광역자치단체, 메트로폴리탄과 비교할 수 없지만, 경기 지역은 한성백제의 도읍을 에워싼 중심영역이었다.

경기도 일대가 역사의 중앙무대로 다시 등장한 때는 5세기(440여년)가 지난 9세기 말 10세기 초였다. 죽주(안성) 등에서 세력을 모은 궁예가 901년 고려를 국호로 하고 송악(松嶽, 개성)에 도읍했다. 그리고 918년 왕건이 마진·태봉 등으로 국호를 바꾸고 철원으로 천도했던 궁예를 축출하고 다시 송악에서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하며 고려를 건국했다. 2018년은 그런 고려의 건국 천 백년이 되는 해이다. 또 18년이 지난 936년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했고, 발해의 태자로 대표되는 발해 유민을 수용하여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루었다. 이후 경기 지역은 천년을 넘게 한반도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현재의 ‘경기문화(京畿文化)’라고 불릴 수 있는 정체성의 원류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1018년 2월 경기제 실시

   
▲ 고려 태조 왕건상 : 개성시 왕건릉 수습. 황제가 썼던 통천관을 쓰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국가에서도 당연히 도읍을 에워싸며 그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뒷받침을 해주는 영역이 형성돼 있었다. 규모와 범위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처음에는 도읍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제반 환경이 형성됐고 이후 그 필요성은 점차 조직화됐다.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에서 ‘경기’의 출발은 중국 당나라 때 도읍인 장안[西安]을 지지하기 위해 그 주변지역을 경현(京縣, 赤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 영향에 따라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왕기(王畿)를 형성했다.

고려왕조에서 경기제(京畿制) 운영의 단서는 개경에 13개의 적현과 기현을 두었던 995년(성종 14)에 보인다. 그렇지만 그때의 적현과 기현은 개성부(開城府)에 소속되고 ‘경기’라 명명되지 못했다. ‘경기’의 명칭이 등장한 것은 이로부터 20여년 후인 1018년(현종 9)이었다. 부(府)를 없애고 현령(縣令)을 설치하는 개편 과정에서였다. 개성부에 소속돼 있던 적현과 기현들은 개성현과 장단현의 현령에게 관할을 받으면서도 중앙의 최고부서인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접 예속되는 이중 구조로 바뀌었다. 사실상 중앙 정부 최고기관의 직속이었다. ‘고려사’에서는 그 구체적인 때를 기록하고 있지 못한 반면에 ‘고려사절요’에서는 2월(음력)로 확인되고 있어 경기의 정명(定名)은 1018년 2월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경기제’ 탄생은 왕조 운영의 제반 기틀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지방제도로서 경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해동천자의 황기(皇畿)와 왕기민(王畿民)이었던 경기와 경기인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은 고려황제 통치권의 중심인 황도(皇都)였다. 해동천자(海東天子)가 다스리던 황제국 고려의 도읍이 개경이었다. 새 왕조를 창건한 직후 태조 왕건은 “하늘에서 내려준 천명을 받은 왕조”라는 뜻으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또 그의 아들인 광종은 960년에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정식으로 명명하고, 준풍(峻豊)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이밖에 황실을 통괄하는 관서였던 제왕부(諸王府)를 둔 사실 등과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여러 증거들을 남겼다.

   
▲ 준풍 4년(963)이 기록돼 있는 기와(안성 망이산성 출토, 한백문화재연구원 제공)

고려의 천하관은 중국 중심의 화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송·요·금 등이 병립하고 있던 동북아시아에서 독립적인 천하들이 별개로 운영되며 대외관계에서 다양한 이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별건곤(別乾坤) 자체였다. 고려는 제후국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번(蕃) 또는 번국(蕃國)을 아우르는 고려 중심의 화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국도인 개경 이외에 북쪽의 서경(西京, 평양), 동쪽의 동경(東京, 경주), 중부의 남경(南京, 양주)을 운영하면서 각기 별도의 경기제를 시행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지만, 서경에서의 경기제 운영은 ‘고려사’에서 확인된다. 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4기(四畿)’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언급은 ‘4곳의 경기’, 즉 4경에서 경기제가 운영됐음을 뜻한다. 고려 전중기에 개경과 서경이 불변의 위상을 가진 것과 달리 동경과 남경 중의 한 곳은 들고나며 고려의 3경(三京) 체제를 구성했다. 즉 3경·4경에서는 각각의 ‘경(京)’을 지지하는 ‘기(畿)’가 별도로 운영됐는데, 이를 굳이 말하자면 서경기·남경기·동경기였다.

서경·남경·동경과 달리 황도였던 개경은 황제가 머물며 정무를 펼치던 곳으로, 나머지 별경(別京)과 다른 위상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황도를 에워싸고 있으면서 황제의 교화를 가장 먼저 받는 곳은 황기(皇畿)라고 불렀다.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의 경기제는 황제국 고려를 지지하는 황기였고, 그곳에 살던 경기민들은 왕기민(王畿民), 황기민(皇畿民)이었다. 이것은 다원적인 천하관(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고려의 황제국 체제 운영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3경’ 또는 ‘4기’는 황제국 고려의 천하를 지지하는 시스템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삼한일통(三韓一統)의 4가지 조건, 다양성·개방성·포용성·역동성

유교가 바탕이 됐던 조선의 문화적인 특징을 사대부, 선비를 중심으로 하는 단아와 세련, 정제미 등으로 규정할 수 있는 반면에 고려 문화의 특징으로는 다양성, 개방성, 포용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상대적인 관점이 전제돼 있지만, 고려 사회는 조선과 무언가 다른 분명히 역동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문화적인 특성들은 황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유교·도교·풍수지리·민간신앙 등 다양한 사상들과 충돌하지 않고 교섭했다. 또 개경의 관문인 벽란도에서는 동아시아를 넘어 아라비아 상인들까지도 자유롭게 교역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코리아’ 가 유래했다. 개방성에 토대한 다양성이 공존했던 고려사회의 모습이다.

   
▲ 삼국사기 : 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경기도가 우리 역사에 등장함.

고려사회에서 개방성과 다양성은 포용성이라는 단계로 확장되면서 역동적인 모습으로 결과지어 졌다. 고려의 통일 과정에서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龍建, 후에 세조로 추증)은 송악에 도읍하려는 이유를 ‘조선·숙신·변한의 통합’이라는 데서 찾았다. 한반도는 물론 옛 고조선·고구려의 영역 회복과 그곳을 구성하고 있던 다종족(민족)·다문화 사회의 통섭을 지향했다. 그들이 얻고자했던 일통삼한(一統三韓)은 개방성과 다양성을 포용성으로 아우르고, 이를 역동적인 공존을 통해 융합한 새로운 창조의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통해 고려사회의 이런 포용성과 역동성을 배우려한다. 그리고 이를 새천년 경기, ‘2018, 경기 천년’의 준비를 위해 적극 참고하려한다. 황제국 고려의 황기(皇畿) 대부분이 지금의 경기(京畿)였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더욱 확장되고 있는 다양한 갈래의 문화적 홍수 속에서 우리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이런 가치들을 배움으로써 역동적인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야 한다. 단순한 구호에 머무르지 않는 통일의 지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