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①후삼국시대 경기도의 호족(豪族)들

   
▲ 칠장사 명부전 벽화 : 칠장사에는 궁예가 어린 시절에 활을 쏘았다는 활터가 있다. 명부전 벽화에도 어린 궁예가 활을 쏘고 있다.

이재범 경기대학교 교수

#호족과 후삼국시대

고려시대를 문벌귀족사회라고 한다. 문벌귀족사회란 특정 가문이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는 사회다. 호족은 문벌귀족의 전신이 되는 계층이다. 호족은 국어사전적 의미로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안’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의 호족은 후삼국시대(신라말고려초)라는 특정 시대와 관련된 역사적 실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호족은 지방에 근거를 둔 세력집단으로 속성상 낙향한 중앙귀족, 지방군사 유력가, 자생(自生)한 농민세력, 생활 근거지를 버리고 떠난 유망민(遊亡民) 등으로 구분된다. 둘째, 호족은 신라의 국가권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무장한 독립 세력이다. 셋째, 호족은 자신들의 지배영역에서 성주·장군 등으로 불리면서 주변세력을 흡수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갔다. 이 호족들 가운데 거대 호족들은 국가를 칭한 집단이 후백제(後百濟)와 후고려(後高麗, 뒤의 摩震, 泰封)이다. 후삼국은 이 두 국가와 기존의 신라를 더한 것이다.

호족들의 향배는 후삼국 통일에 있어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후삼국 통일은 전제적 성향이 강했던 궁예나 견훤에 비하여 호족들의 독립적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왕건의 호족연합책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호족들은 후삼국통일 후에는 중앙의 문벌귀족과 지방의 향리로 크게 계층분화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사회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호족들의 후예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족은 고려시대의 서막을 연 역사적 실체였던 것이다.



#경기도의 여러 호족들의 성향과 역할

경기도에는 많은 호족들이 있었다. 당시 경기도 지역은 신라 중심부인 동경(東京, 경주)에서 볼 때는 변방인 한주(漢州)였다. 한주는 군사적으로 중요시돼 군단적(軍團的)성격의 정(停)을 두 곳에 설치했다. 이러한 경기도에는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독립적 성향이 강한 호족들이 일찍부터 나타났다. 822년에 난을 일으켰던 김헌창(金憲昌)의 아들 825년에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여주로 추정)을 근거로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경기도는 신라말에 이르게 되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호족 집단들이 나타난다. 대호족인 죽주의 기훤이 대표적이다. 당시 호족이란 존재는 신라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반란세력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적(賊)’으로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경기도 대표 호족 가운데 하나로 ‘죽주적(竹州賊)’ 기훤(箕萱)이 있다. 죽주(안성시 죽산)에는 현재도 기훤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죽주산성(竹州山城)이 있다. 기훤 자신의 생몰년이나 출신성분 등 개인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고, 그의 휘하로 뒤에 후고려의 왕이 되는 궁예가 의탁했다는 사실로 잘 알려진 호족이다.

   
▲ 국사암 석조여래입상 :국사암 내에 위치한 삼존석불로 궁예미륵이라고도 한다. 3기의 석불상은 각각 궁예와 그의 두 아들인 청광, 신광 보살을 가르킨다.

후삼국시대를 한때 호령했던 궁예도 대표적인 경기도 호족이다. 궁예의 출신이 신라왕실이고 그가 세운 나라의 중심지가 강원도 철원이지만, 궁예의 세력형성과정은 경기도에서 이루어졌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으나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뒤 숨어 살면서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 지역을 강원도 영월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안성 칠장사(七藏寺)에 어린 시절의 궁예와 관련된 설화가 남아 있어 흥미롭다.

칠장사에는 궁예가 어린 시절에 활을 쏘았다는 활터가 있다. 칠장사 부근에는 궁예가 왕자를 낳았다는 태자리, 궁예의 부인 강씨의 성을 따서 붙인 강씨골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기솔리 국사암(國師巖)의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3기의 석불상은 각각 궁예와 그의 두 아들인 청광(靑光)·신광(神光) 보살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한다. 국사암 옆에 있는 쌍미륵사(雙彌勒寺)의 미륵불 2기는 궁예가 양길과의 비뇌성전투(卑惱城戰鬪)에서 승리한 기념물로 축조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궁예와 경기도의 관련성은 그가 송악에 도읍을 정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부각된다. 궁예는 891년에 기훤의 휘하에 있었으나 불화가 생겨 892년에는 기훤의 부하였던 원회(元會)·신훤(申煊) 등과 함께 북원(北原 : 강원도 원주)의 호족 양길(梁吉)에게로 간 뒤 명주(강릉)에서 장군이 되었으나, 송악의 왕건가와 제휴를 한 뒤 경기도 호족의 도움으로 국가 건설을 하게 됐다. 궁예는 901년 송악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그 뒤 송악은 905~919년까지 철원시대를 제외하면 고려의 도읍지로 천하의 중심에 있었다.

진정한 경기도의 호족은 왕건과 그의 집안이다. 왕건가는 그의 선조가 송악(개성)에 정착해 해상세력으로 성장한 호족이다.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해 왕건의 아버지 용건(龍建)를 낳았다고 했다. 왕건은 서해 용왕의 후손이며, 용왕은 해상세력으로 인정하고 있다. 왕건가는 서해의 해상세력과 연결된 송악지역의 호족이었다.

왕건가는 궁예가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변경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쿠데타로 궁예를 축출한 뒤 도읍을 송악(開州)으로 옮기고 국호를 다시 고려로 바꾼 명실상부한 고려의 태조였다. 그로부터 50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은 경기도 송악이었다. 이렇게 궁예와 왕건을 거쳐 경기도는 확고부동한 천하의 중심지가 됐다.

경기도를 천하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있어서 경기도 호족들의 공로가 컸다. 현재의 수원지역 호족은 최승규(崔承珪, 수주최씨)와 김칠(金七, 수주김씨)이었다. 수원의 신라말 지명은 수성군(水城郡)이었는데, 최승규와 김칠이 왕건을 도와 그 공로로 수주(水州)로 격상됐다고 ‘고려사’ 지리지에 전한다. 수주는 지금의 수원과 화성·오산 등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다. 당시 왕건은 광교산 일대에서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교산(光敎山)은 본래 광악산(光嶽山)이었는데, 왕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전투에 승리해 광교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승리의 배경에 최승규와 김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천서씨도 경기 호족의 대표적 존재다.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전쟁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특히 왕건이 남정(南征)시에 강을 건너지 못하여 곤경에 빠지자 그 지역민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천(利川)이라는 지명은 이 일로 인해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천서씨는 서희의 본관이다.

당에서 보낸 8학사 가운데 한사람인 홍천하(洪天河)의 후예로 당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홍은열(洪殷悅, 남양홍씨)도 경기도의 호족이다. 홍은열은 고려 건국 후에 익대공신(翼戴功臣)이 되었다고 ‘남양홍씨 세보’에 전한다.

포천(命旨城) 일대의 호족으로는 장군 성달(成達)과 그의 아우인 이달(伊達), 단림(端林)이 있었는데, 이들은 923년 3월에 왕건에게 귀부했다고 ‘고려사’ 태조세가에 전하고 있다.

안성 죽산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박적오(朴赤烏, 죽산박씨)는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와 같은 의미인 적오를 이름으로 했다. 그는 대모달(大模達)로 불렸는데, 대모달은 고구려어로 장군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죽산박씨가 반신라적이며, 고구려 회귀적 경향이 강하였던 것을 알려준다.

   
▲ 안성 죽주산성 : 후고려의 왕이 되는 궁예가 의탁한 것으로 유명한 경기도 대표 호족 기훤의 근거지로 추정되고 있는 죽주산성.

파평윤씨 윤신달(尹莘達)은 파주 일대의 호족이었다. 왕건을 보좌해 후삼국통일이 끝난 뒤 삼한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신라에서 시흥으로 이주해 온 여청(餘淸)의 후손인 금천강씨 강궁진(姜弓珍)은 금주(衿州)를 중심으로 활약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됐다.

허선문(許宣文, 공암허씨)은 서울 강서구 허준로(許浚路)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족이었다. 이 지역은 고려초에 공암(孔巖)이라고 하였는데, 허선문은 김포(金浦, 黔浦) 지역의 평야와 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대호족으로 성장해 왕건을 도와 공신에 책봉된다.



#경기도 호족의 변화와 역사적 의미

경기도의 호족들은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통일전쟁을 완수하는데 힘을 쏟았다.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호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 성립 후에는 호족의 후예들이 고려를 수호했다. 거란의 1차 침입때 서희는 담판으로 강동6주를 획득했고, 2차 침입 때는 수주최씨인 최사위(崔士威)가 선방했으며, 3차 침입때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은 금천강씨이다. 또 동북방의 여진족이 위협을 해오자 9성을 축조한 윤관은 파평윤씨이다. 고려 호족의 후예들의 활약은 고려 국가가 지속되는 기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경기도 호족들은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통일을 완성했고, 그 후예들은 국가 기반 안정, 외침 격퇴 등에 기여하며 이를 지켰다. 경기도 호족은 고려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였던 역사적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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