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12)고려의 경기인 道가 본관인 성씨 인물 ② 금천강씨와 강감찬

   
 

<12>경기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인물

(2)금천강씨, 강감찬

장덕호 실학박물관 학예실장

강감찬은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자신의 재산 증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 것 없었으며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 묻은 옷을 입고 있어서 누구나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아가서 국사를 처리하며 국책을 결정할 때에는 당당히 국가 중신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였다.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나라가 평온한 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이라 여겼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전(姜邯贊傳)에 나오는 강감찬에 대한 후세 역사가의 평이다.

#귀주대첩, 11세기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던 10세기 초,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정치적 대변혁의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신라를 대신해 고려가, 중국에는 송(宋)이, 만주지방에는 발해를 대신해 거란(契丹)이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던 때로 삼국 모두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 외교적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특히 고려는 중국 중원의 송나라와는 거리가 멀어도 화친하려 하였으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금수(禽獸)의 나라라 하여 국초부터 견제하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거란은 993년(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80만 군사를 이끌고 서북면으로 쳐들어오자 서희(徐熙)는 외교적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했다. 거란은 목종(穆宗)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 다시 고려에 침입했다. 이때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거란은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거란은 1018년 또다시 침입했는데, 이때 고려의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찌르니 이것이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당시 고려는 강감찬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즉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로 임명하여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義州 威遠面)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 2천명을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하였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귀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가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때 강감찬은 71세로서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거란의 고려 침략 목적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려와 송의 반거란 연합전선 형성을 저지하려는 것이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019년 고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강화를 위해 강감찬의 건의로 1029년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았다. 또 1033~44년 모든 국경선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았다. 강감찬의 활약으로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함으로써 향후 100여년간 송·요·고려 삼국은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의 조판을 시작하게 된다.

   
낙성대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의 사당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됐다. 그가 출생했을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낙성대라는 이름이 붙였다.

#금천강씨, 고려의 문벌귀족.

강감찬 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장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릴 때부터 들은 귀주대첩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강감찬을 용맹한 장군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강감찬은 문관(文官)이었다. 고려시대의 관직제도에는 문무관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3품 이상의 고위직에 이르면 무관(武官)은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었고 문관이 겸직하게 되었으니, 문관은 무관을 무시하게 되었고, 사회풍조 역시 무반보다는 문반을 우대하여 결국 무신난(武臣亂)과 같은 국가적으로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즉 강감찬은 문관으로서 거란 침입시 최고의 무반 장군직을 겸직하면서 귀주 대첩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고려 전기의 문신으로 군인, 정치인이다. 강이식의 후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금주(衿州 : 현재 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관악구·광명시 일대)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983년(성종 2년)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작위는 천수현개국자작(天水縣開國子爵)에 봉해졌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이다.

금천강씨는 진주강씨 인헌공파라고도 한다. 인헌공은 강감찬의 시호이며, 금천은 강감찬의 고향이다. 따라서 강감찬이 현달함으로써 후손들이 강감찬의 출생지인 금천을 따서 인헌공파를 ‘금천강씨(衿川姜氏)’로 부른 것이다.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도시조로 삼고 있다. 강감찬의 선조인 여청(餘淸)은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 하였으며, 여청의 5대손이며 강감찬의 아버지인 궁진(弓珍)은 고려가 건국할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봉해졌으며 여후(呂侯)로 있었다. 강감찬의 6대조인 여청이 활동하던 시기는 신라하대로서 왕위쟁탈전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로 지방은 사실상 호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때 여청은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금천으로 이주하여 독자적 세력을 확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강감찬의 아버지인 궁진 역시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경기서남부 지역의 대호족으로서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일조함으로써 삼한벽상공신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고려초기 경기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막강한 문벌귀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전설로 전해지는 명재상, 강감찬.

강감찬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고려사’ ‘열전’을 비롯하여 ‘세종실록 世宗實錄’ ‘지리지’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海東異蹟’ ‘기문총화 記聞叢話’ 등의 문헌과 전국 각지에서 구전설화가 널리 전해지고 있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날 밤 한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으므로 데리고 와 길렀는데 그가 곧 강감찬이다.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만나보고는 문곡성(文曲星 : 북두칠성 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구성(九星) 중 하나로, 글과 재물을 관장)의 화신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바로 별이 떨어진 곳, 즉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현재 서울 관악구의 낙성대(落星垈)이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기문총화’에는 부적(符籍)으로 호랑이를 물리친 일화가 ‘해동이적’에는 출생담과 함께 호랑이 퇴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구전설화는 문헌설화에서 나타나는 강감찬의 이인적(異人的) 면모를 더 확대해서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출생담, 성장시 일화, 벼슬한 이후 일화 등이다. 이렇듯 강감찬과 같이 실존 인물에 대해 다양한 설화가 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한 강감찬 설화에는 정사(正史)에 나타나는 명장으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강감찬이 호랑이 퇴치와 같이 백성들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 주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생존시 그가 행한 애민적 활동이 구전으로 오랜 기간 전해진 것이며 ‘강시즁젼’과 같이 인쇄본으로 출간되어 현재까지 전해질 정도로 강감찬은 생존시 백성들에게는 영웅이었던 것 같다.

   
1018년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찌를 귀주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982년 발행된 우표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듯 나라의 풍년도 강감찬의 공으로 여긴 것으로 보아 강감찬은 생존시 백성들에게는 스타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고려초 정치·경제·사회 전부분에 걸쳐 고려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국가였으며 거란의 침입 등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많았을 때였다. 이때 강감찬은 시중으로서 장군으로서 고려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국민의 안녕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었기에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금천강씨는 고려초 강궁진, 강감찬 부자가 크게 현달함으로서 고려 초기에 문벌귀족으로 성장함으로써 경기도를 거점으로 하는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고려 중기부터 서서히 그 세력이 약화되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 12대손 강양(姜揚) 때 이르러 다시 번성하였다. 강감찬의 후손으로는 조선 인조때 우의정 세자부(世子傅)를 지낸 문정공 강석기(姜碩期)가 있으며, 그의 딸이 소현세자의 빈이 되는 민회빈(愍懷嬪) 강씨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일본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의사 강우규(姜宇奎)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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