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13)고려의 경기인, 경기도가 본관인 성씨 인물 ③ 경원이씨와 '이자연'

   
▲ 청평사 전경

<13>경기도가 본관인 성씨 인물-경원이씨, 이자연.

이재범 경기대교수



고려시대를 문벌귀족시대라고 한다. 문벌귀족은 나말려초의 지방 호족이나 개국공신들이 고위 관직을 세습하면서 형성된 일종의 신분층이다. 문벌귀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는데, 음서와 공음전시(功蔭田柴)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음서제는 5품 이상 관리의 후손에게 산직(散職)이라고 하여 대기직을 주었는데, 이 산직에게도 일정한 급여에 해당하는 보상을 하였다. 더구나 음서로 등용된 관리가 과거로 등용된 관리 보다 출세에 있어서 더 빠른 진출을 하였다. 또한 공음전시는 세습되는 토지로서 문벌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문벌귀족의 세습 권력 독점은 많은 모순을 노출하였다. 때로 문벌귀족들의 세력 확대는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경원이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대표적이다. 왕권을 능가할 정도의 문벌귀족의 실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실증적인 입장에서의 확인은 고려사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원인재는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인천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사당이다. 원인의 뜻은 인천 이씨의 근원을 뜻하며, 도시 가운데서 근처 숲과 함게 한옥의 품의가 깊이 느껴진다. 사진은 원인재 첨소문 좌측에 있는 이허겸의 신도비.

#경원이씨의 유래와 시조 이허겸.

경원이씨는 이허겸(李許謙)을 시조(始祖)로 하는 인천 지역의 세거 성씨이다. 경원이씨는 인주이씨, 인천이씨라고도 한다. 그 까닭은 인천이 시기에 따라 경원, 인주 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원이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가야 왕실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허황후(許皇后)의 23세손인 아찬(阿飡·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등) 허기(許奇)가 신라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갔는데, 마침 그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이듬해에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피난을 가게 되자 허기(許奇)가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호종(扈從)하였고, 757년에 난이 평정되자 현종이 도읍으로 돌아와 허기에게 호종의 공을 치하하기 위하여 황제의 성(姓)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758년에 허기(許奇)가 신라로 귀국을 하게되자 경덕왕이 허기에게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함께 식읍(食邑) 1천500호를 봉하였고, 아울러 본래의 이름인 허기 앞에 당 의 황제가 내려 준 성인 이를 붙여 이허기라고 작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원이씨 문중에서는 성시가 허씨(許氏)에서 이씨(李氏)가 되었으므로 이허기(李許奇)를 새롭게 성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득성조(得姓祖)라 칭하고 있다. 인천 이씨가 인천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은 인천 이씨 문중 문집인 ‘소성세덕(邵城世德)’과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진다.



#경원이씨와 안산김씨.

경원이씨의 성장을 말하는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가문이 안산김씨이다. 안산김씨는 거란의 침략으로 현종이 나주에 몽진을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공주에 머물게 되자 당시 공주절도사였던 김은부가 자신의 딸들을 납비(納妃) 함으로써 왕실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안산김씨는 60여년에 걸쳐 고려의 외척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게 된다. 김은부의 세딸은 이허겸의 외손녀로 김은부의 부인이 바로 이허겸의 딸이었던 것이다. 경원이씨는 바로 안산김씨와 혼인을 통하여 고려의 외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허겸은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의 10세손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다. 이허겸(李許謙)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김은부(金殷傅)에게 시집가서 세 딸을 낳았고, 이 세 딸이 모두 현종(顯宗)의 비(妃)가 되었던 것이다. 이허겸의 딸, 안효국대부인이 낳은 세 딸이 현종 비가 되면서 이허겸은 덕종·정종·문종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되었다. 이로써 인천을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을 통해 기반을 다진 인주 이씨는 고려 왕실과의 외척으로서 명문거족(名門巨族)이 되었다.

경원이씨는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80여 년 간 외척으로 문벌귀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이 지위는 숙종의 즉위와 함께 서서히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1094년 문종의 아들인 선종이 죽고,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헌종이 11세에 즉위하게 되자 후사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때 경원이씨 이자의는 자신의 여동생인 원신궁주와 선종의 사이에서 태어난 한산후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거사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헌종의 숙부이면서 계림공(숙종)이 이자의 일파를 제압하고 중서령을 거쳐 11월에 헌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즉위 후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근친혼을 통한 특정 가문의 정치권력 독점을 막기 위하여 6촌 이내의 혼인을 금지하는 령(令)을 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즉위한 예종은 다시 경원이씨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고려의 왕실이 절대적인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는 징표이기도 하였다. 이자겸의 저택은 국왕의 궁 보다도 화려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든 외척으로서의 이자겸의 세도는 커져갔고, 마침내 왕실에서도 그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당시의 국왕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 주겠다고 할 정도였으므로 그 문벌귀족의 시대라는 고려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결국 경원이씨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왕실과 특정 가문의 대립은 이자겸의 난으로 표면화되었고 결국 왕실이 이를 제압함으로써 왕씨 고려는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경원이씨 가문의 인물들.

‘고려사-이자연전(李子淵傳)’에서 “이자연은 인주(仁州)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신라의 대관으로서 당나라에 사신을 갔는데, 천자가 가상히 여겨 이씨 성을 내렸다. 그 후 그의 자손이 소성현, 즉 인주로 이주하였다. 이허겸의 대에 와서 소성백의 봉작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이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이한(李翰)이요 이한의 아들이 이자연(李子淵), 이자상(李子祥)인 바 이자상은 죽은 뒤에 상서 우복야 벼슬을 추증 받았다”라고 하였다.

인천이씨가 권문세가(權門勢家)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마련한 인물은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이었다. 비록 외척이라는 혼인관계를 통한 성장이었지만, 고려 사회를 지챙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자연은 1052년(문종 6) 2월, 자신의 큰 딸을 문종의 왕비로 보냈으며 나머지 두 딸도 차례로 문종에게 납비하였다. 그리고 인예 태후(仁睿太后)가 문종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왕자와 2명의 궁주(宮主) 등 모두 13왕자 6공주를 낳았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숙종(肅宗)은 관례에 따라 왕비인 인예태후의 친정인 인천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원이씨를 고려의 최고 문벌귀족으로 올린 인물은 이자겸이다. 이자겸에 대해서는 마치 국난을 일으킨 반역자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은 다른 면도 있었던 것 같다. 1123년(인종 1)에 송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이자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풍채는 맑고 위의는 온화하며 어질고 착한 이들을 반겼다.”

당시에 경원이씨가 세력을 떨칠 때였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로 이자겸이 그러한 지도적 인물일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비록 외척 세력으로 과도한 권력을 행세했자는 평가가 일반지만, 이자겸은 당시 상당한 국제적인 안목이 있었던 인물이다. 나쁘게 말하면 사대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강대국과의 외교에 대해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경원이씨와 관련된 문화재라고 하면 강원도 춘천시의 청평사(淸平寺)가 있다. 청평사는 이자현(李資玄)이 지은 암자였다. 이자현은 청평거사(淸平居士)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그는 1089년(선종 6)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하고 암자를 지어 나물밥과 베옷으로 생활하며 선(禪)을 즐겼다고 한다. 이자현은 예종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에 대한 요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고려사절요 권9’에는 이자현에 대하여 ‘부귀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나라의 외척이 되었으나,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한적한 것을 좋아하여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세력을 가졌던 경원이씨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왕실과의 관계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인천이라는 지역의 지리적 위상과 관련된다. 인천은 1459년(세조 5년)에 군(郡)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다. 그 이유는 왕의 즉위시에 왕과 왕비의 친가와 외가의 지역 등급을 올려주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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