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14)고려의 경기인 道가 본관인 성씨 인물 ④ 파평윤씨와 '윤관'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사진)는 윤관(尹瓘·?∼1111) 장군이 1107년 동북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 영토를 확장한 후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의 영토’라고 새겨진 경계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다.

<14>경기도가 본관인 성씨 인물-파평윤씨

이재범 경기대교수

#파평윤씨의 발상지 파평.

파평윤씨는 고려시대의 큰 성씨이다. 파평윤씨는 지금의 파주시 파평면을 발상지로 한다. 파평은 본래 백제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 또는 額蓬縣)이었는데, 그 뒤 고구려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파평으로 되어 내소군(來蘇郡)의 영현이 되었다. 그 뒤 고려시대에 들어와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단현(長湍縣)에 속하였고, 1063년(문종 17)에 개성부(開城府)의 직할지가 되었다. 1460년(세조 6) 왕비의 고향이라고 하여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

파평윤씨의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윤신달(尹莘達)이다. 그와 관련된 탄생설화가 있다. 신라 말에 한 노인이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빛이 한 줄기 비치면서 궤(櫃)가 나타나 그것을 열어보니 어린 아이가 있어 데려다 키웠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사를 지냈던 파평윤씨의 시조인 윤신달이라고 한다. 파평윤씨는 고려의 명문거족이 되었으며, 관(瓘)때에 가장 번성하여 문벌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이다.

#윤관의 치적, 여진정벌과 9성.

파평윤씨가의 인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가 윤관(?~1111)이다. 그는 무장(武將)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문과 급제자로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윤관은 문종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숙종대에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숙종대에 기반을 단단히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며느리가 숙종비인 명의태후(明懿太后)의 동생이었던 가문의 실력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떻든 숙종대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남경 건설, 금속화폐 유통책 실시 등 일련의 신법(新法)을 실시했는데, 그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윤관이라는 점이다. 특히 그의 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남경(南京, 현재의 서울) 개척이다. 숙종이 ‘남경’을 설치할 때 윤관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고려사’에 ‘윤관 등으로 하여금 남경의 지세를 살피게 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도읍 건설에 착수했다(1101년, 숙종 6)’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남경의 궁궐은 1104년에 완공되었는데, 윤관이 남경 건설의 중임을 맡은 것은 그의 지역 기반이 파평(지금의 경기도 파주)이라는 사실이 남경과 가깝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윤관의 치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진 정벌과 9성 개척이다. 근 1107년(예종 2)에 17만 병력으로 여진족을 제압하고, ‘9성’을 쌓았다. 당시 고려 동북면에서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여진족이 자주 고려에 위협을 가해왔다. 고려에서는 윤관을 보내어 여진족 정복을 단행했으나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패하였다. 윤관은 고려군이 여진족에게 패배한 원인을 고려의 보병 중심의 군대가 여진의 기병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윤관은 1107년 원수로서 17만의 병력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고 그 지역에 9성을 쌓았다. 그러나 9성 위치가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군사동원을 무리하게 하여 원망이 커진 국내 정세와 함께 여진족의 9성 환부를 강력하게 요청하여 왔으므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한편 윤관이 축조하였다고 하는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대표적인 설이 함경평야설, 길주설, 두만강 지역설 등이 있다는 것만 밝혀둔다. 윤관은 정벌에서 돌아와 패군의 책임을 물어 관직이 박탈당하였다가 뒤에 예종에 의하여 복직되었가, 1130년에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윤언이와 묘청의 난

파평윤씨의 인물 가운데 윤언이(尹彦 ‘턱이’ 한자가 없음 그려야 할 듯. )를 기억해 하여야 한다. 그는 호를 금강거사(金剛居士)라고 하는데, 윤관(瓘)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한 문인 출신으로 인종 때 기거랑(起居 ‘사내랑’ 한자가 없음 )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함께 인종을 도와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128년(인종 6)에는 예부시랑으로 송나라에 국교 수립을 청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1132년에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받는 등 문장과 학문에 능하였다.

그러나 윤언이는 김부식(金富軾)과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133년에는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론하게 하고, 윤언이에게 그 강평을 하게 하였다. 윤언이는 ‘주역’에 정통하였으므로 김부식을 반박하는 논리를 펴 궁색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 또한 아버지인 윤관이 예종 때 왕명으로 지었던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義天)의 비문을 김부식이 짓게 된 것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났다(1135년). 윤언이는 김부식을 원수로 한 출정군으로 반란의 진압에 나서 서경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김부식은 윤언이가 정지상과 내통하였다고 보고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고, 1148년(의종 2)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판형부사(判刑部事)에 올랐다. 윤언이는 문장을 잘하였고 학문에도 밝았다. 특히 ‘주역’에 통달하여 ‘역해(易解)’를 저술하기도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불교를 매우 좋아하여 관승(貫乘)이라는 승려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은퇴하여서는 파평에서 살았는데,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에서 내리는 상으로 그 부인은 매년 녹(祿)을 받았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한편 운언이와 관련된 묘청의 난에 대해서는 단순한 반란이 아닌 한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사건의 하나라고 해석한 단재 신채호의 주장이 있어 소개해 둔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사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조선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평가 했다.

   
고려 명장인 파평윤씨의 윤관장군의 역사가 담긴 묘이다. 윤관장군묘는 릉을 떠올리게 하는 규모의 묘지로 장군의 묘 이외에 윤관장군의 가마와 윤관장군의 말을 묻은 교자총과 천마총도 볼 수 있어 그의 업적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조선으로 이어진 파평윤씨.

파평윤씨는 조선시대가 되면 외척으로서 세력을 갖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학문과 정치 일선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윤관에게는 아들이 7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번성하여 여러 분파가 생기면서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명성을 유지했다. 그 가운데서도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承禮)와 소정공파(昭靖公派:坤)에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8할 가량이 된다고 한다.

판도공파는 윤승례(尹承禮)의 아들이며 세조의 장인인 윤번(尹磻) 대에서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珪)·부윤공파(府尹公派:普老)·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에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뉘어진다. 그의 맏아들인 윤사분(尹士昐)은 우의정, 둘째 윤사균(尹士 ‘개간할 균’ 한자가 없음. )은 예조판서, 셋째 윤사흔(尹士昕)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윤사균과 윤사흔의 딸이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됨으로써 경쟁관계가 되었다. 윤사균의 증손 윤임(尹任)의 여동생이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인데, 장경왕후는 세자(仁宗)를 낳고 엿새만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가 된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을 낳게 되자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파가 대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중심이 된 소윤이 정치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예학에 밝았던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이 있다. 그는 유계(兪棨)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장인인 권시(權 ‘두려워할 시’ 한자가 없음. )와 김집(金集)에게서도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회천에 거주하고 있었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예론(禮論)에 가장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모두 사퇴하였던 인물이었다.

파평윤씨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성하여 조선시대에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현재에도 여러 윤씨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번성한 집안이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윤관·윤언이와 같이 나라의 어려움을 솔선수범하여 막아낸 인물들을 배출하였던 명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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