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15>초상화로 남은 고려인 ② 대각국사 의천

   
▲ 선암사 대각국사진영(仙岩寺大覺國師眞影)은 보물 제1044호로, 대각국사 의천의 초상화이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선암사에 소재해 있다.

이원복(문화재위원, 전 경기도박물관장)

#우리 땅에서 완성된 불교와 성리학 ‘우리 민족의 역할과 기여’

오늘날 우리 의식구조 심저에는 불교적 사고가 깊게 내재되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에 있어 불교가 기친 영향은 사회·문화·정치 제 분야 모두에 걸쳐 실로 지대하다. 불교는 개인 구원의 문제에 국한된 신앙만이 아니다. 고대국가의 형성에 있어 고등종교는 필수적인 요소로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니 서구 기독교 역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고대 삼국의 성장, 신라의 통일, 나아가 주체적인 이념으로 고려왕조가 500년 가까이 견지된 것 등 이 모두에서 불교에 힘입은 바 크다.

현존하는 전통 문화유산 중 가시적인 조형미술에 있어 명승대찰(名勝大刹)이란 용어가 말해주듯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은 여러 고찰(古刹)이며, 한국조각사에 금자탑격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석굴암 본존과 보살상 등 불상, 화려하고 섬세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려불화, 탑과 의식 용구인 아름다운 소리와 형태를 지닌 일본인이 마치 생물체의 학명인 양 조선종(朝鮮鐘)으로 명명한 범종 등 건축과 조각·공예·회화 등 미술사 전 분야에 있어 절대적이다.

진리에 외제와 국산의 경계가 없다. 불교의 시작은 인도이나 신앙과 사상체계 형성에 있어 탄생지를 벗어나 중국에서 성장해 우리나라에서 꽃피고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아 크게 어긋나자 않는다.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의천(義天)(1055.9.28~1101.10.5) 등과 공자에서 비롯한 유교도 다르지 않으니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은 좁은 조선 땅에 국한된 시골 훈장에 머문 것이 아니다. 받아들인 이들 사상을 심화, 발전시킨 고승대덕(高僧大德)이며 사상가이자 대학자로 거유(巨儒)들이 아닐 수 없다. 불교는 신앙에 앞서 철학이며 평등(平等)과 무상(無常)이란 진리의 두 기둥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평등은 신분이나 남녀 등 인간관계만이 아닌, 코끼리나 파리의 생명의 무게는 같으며 나아가 무생물과 유생물까지 동일하게 본다. 무상은 흔히 입에 담는 인생무상같이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니힐리즘은 아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듯 모든 것은 바뀌고 변한다는 의미이다. 형체를 만들면 이에 집착해 실상에 대한 인식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기에 고타마 싯탈다 사후 근 500년간 무불상시대로 불상을 빚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오감을 통해 인식이 이루어지니 사유체계만이 아닌 스승에 대한 공경과 함께 장엄과 예배, 가르침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성스럽고 지고지순한 가시적인 종교미술이 꽃피게 된다.

고타마 역시 왕자로 출가했듯 대각국사 의천과 그의 법통을 이은 형의 다섯째 아들인 제자 징엄(澄儼)·1090~1141)의 예처럼 고려시대에 불문(佛門)에 드는 왕자들이 있었다. 정종 2년(1036)에 왕자가 4명 이상일 경우 왕자의 출가를 허락함을 공표했고, 1027년 건립된 영통사(靈通寺)를 이들 왕자들이 경율(經律)을 익히는 도량으로 삼았다.

#대각국사 의천 ‘천태종의 중흥조’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천태종(天台宗)을 세워 불교를 통합하고 불경을 간행하는 등 이 땅의 불교문화 발전에 역할이 빛나는 큰 스님이다. 그는 고려 11대 문종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송 철종과 같은 후(?·갈다 후, 불다 후 한자가 없네요.)이며 어머니는 인예태후이다. 세수는 47년으로 결코 긴 삶은 아니나, 11세기 후반에 분명한 족적을 남긴 활동과 업적이 두드러진다. 의천은 그의 자이며 대각국사는 시호이다. 11세 때 자원해 왕사인 외삼촌 경덕국사 난원(爛圓)에게서 계를 받는다. 그는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된다. 흥왕사 시절 교장도감을 세워 ‘속장경(續藏經)’을 완성해 간행했다. 한 때 해인사에 머물기도 했고 흥원사와 흥왕사 주지를 역임했다.

   

세 형 모두 왕이 되었으니 제일 큰형인 순종이 문종에 이어 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선종과 숙종 두 형이 각기 10년 안팎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1097년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 있는 형 숙종 때 주전론(鑄錢論)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사회경제 측면에 국가경영에 일조했다. 의천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떨쳤으니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 등 불전에 두루 통달했고 이뿐만이 아니라 유학 및 제자백가 및 역사서도 읽었다. 다수의 저술을 다수 남긴 학승으로 ‘석원사림(釋苑詞林)’을 비롯해 행적과 시 문집인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및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등 편저가 전한다.

요(遼) 도종이 그에게 계를 받아 국사와 사제지연을 맺게 되어 양국의 교류가 이어졌다. 31세 때는 구법과 견문을 넓히려 바다 건너 송(宋)을 방문해 고승들을 접견하고 여러 불교 성지를 순례했고 송의 황제 철종을 만나는 등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삶의 자세와 국제적인 활동 또한 주목된다. 그에 관한 유물로는 비록 19세기 초 이모한 그림이나 제작시기와 그린 화가가 분명한 진영이 전한다.

경북 칠곡 금오산 동쪽에는 보물 제251호인 선봉사 대각국사비가 있다 이 비는 고려 인종 11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임존(林存)이 짓고 인(麟)이 썼다. 또한 북한 영역인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에 자리한 영통사에도 의천의 입적 후 사리를 봉안했고 비를 세웠다. 영통사는 조선이후 퇴락하여 대각국사비와 탑이 폐허에 방치되었다가 2005년에 이르러 대한불교천태종과 북한이 영통사를 복원했다. 국보급인 이 비의 비문은 김부식(金富軾)이 썼다

예전에 훌륭한 나라에 상서로운 구름 자욱하더니

자미원 지혜의 달그림자를 작은 바다에 떨구었네.

세간에 남달리 태어나 우뚝 솟아 걸출하더니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성을 넘어 출가하여 문신하고 상투를 잘랐다네.

설산에서 고행하여 여섯 해를 주리더니

배 띄어 중국에서 노닐게 되니 이름 더욱 빛이 났네.

천자가 위로하여 맞이해 대궐에서 지냈으며

스승 찾아 학문 닦되 자신을 경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네.

화엄경과 여로 논초 깊이깊이 연구하고

온축된 기상을 잘 기르니 보리수의 꽃봉오리로세 .

병의 물을 쏟듯 막힘없이 대답하여 진리의 말씀 사방으로 뿌리시니

명검이 뛰고 구슬 되돌려오듯 하여

도와 영예 배로 높아졌네.

...

진영의 맑은 저 향기 법의 깃발 우뚝 솟았고

임금께서 친히 슨 제찬 뛰어난 문장 밝게 빛나네.

제찬 중에서

#고승의 초상, 진영(眞影) ‘우리 초상의 한 영역’

동서양 모두에서 그림의 소재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동물이다. 물론 제작 이유가 의식과 주술로 정리되는 선사미술은 오늘날 감상을 위한 일반그림과는 다르다. 이어 인물이니 종교미술에 있어 교주를 비롯한 다양한 예배의 대상들도 이 범주에 든다. 동서양 자연관의 차이는 있으나 자연경관을 담은 산수화는 가장 나중에 출현한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우러러 공경하는 성군(聖君)과 반면교사의 기능을 지닌 폭군에 대한 포폄(褒貶)의 목적에서 한(漢) 나라부터 성행했다. 불교에 있어 불상 외에 점차 조사(祖師)나 고승 초상은 스승에 대한 공경, 법통과 학맥의 측면에서 조사와 고승의 진영은 줄기차게 그려졌다.

통일신라는 물론 고려시대 그려진 승상의 현존 예는 실제 찾기 힘들다. 하지만 문헌과 경주 단속산 신행선사비문(神行禪師碑文·813년) 등 금석학 자료를 통해 스님 열반 후 진영을 제작한 사실이 확인된다. 일본 내 원효와 위상의 진영이 전하기도 한다. 통일신라 이후 특히 선종의 유행과 더불어 고려왕조로 접어들어 성행했다. 의천은 문집에 자신의 진영에 관한 촌평과 함께 다른 스님 초상에 부친 시 등 찬문을 여럿 남기고 있다. 스님상은 대체로 사찰에 속한 화승인 금어(金魚)가 그림이 일반적이나 화원이 그린 예도 없지 않다. 이들 승상은 독자적은 양식과 정형을 이룩해 우리나라 초상에서 어엿한 한 영역을 점한다.

순천 선암사에 간직된 보물 제1044호 ‘대각국사 진영’은 스님의 열반 후 704년이 지난 후 제작되었으니 몇 차례나 확인은 힘드나 대대로 전해온 초상을 이모한 것으로 사료된다. 화기에 의해 이를 그린 화가와 그려진 연대가 확인되니 1805년 승려화가 도일비구(道日比丘)가 옮겨 그렸다. 화면 좌측상단 찬문은 의천의 생애와 활동을 집약적으로 잘 전해준다.

의자에 앉아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왼쪽 얼굴이 부각된 좌안7분상이다. 양식과 향식 그리고 화풍을 살필 때 정형화된 진영으로 지난번에 소개된 ‘도선선사 진영’과 취한 자세와 일반 초상과 달리 희게 표현된 안면처리, 승복, 색감 등에서 유사하다. 화면 바탕에 좀 더 푸른 기운이 돌며 의자의 모습과 인궤가 놓인 별도의 목가구가 등장하지 않으며 화문석이 화면 하단만이 아닌 어깨가지 올라온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소 볼륨 있는 체구로 녹색의 장삼 위에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붉은 가사를 입었는데 이음에 정교한 꽃무늬를 금선으로, 옷자락과 띠를 날카롭게 날리게 한 점, 색조의 조화 등이 돋보이며 이 작품의 수준을 알려준다. 앞선 시대의 유풍과 19세기 일반화된 양식도 담고 있다. 오른손으로 자연스레 의자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 긴 주장자를 잡고 있으며, 의연한 자세에 내면을 응시하는 눈, 듬직한 코, 다문 작은 입, 적당이 골 잡힌 이마와 입가의 주름 등 기록이 전하는 스님의 모습에 부합하는 양 40대 고승의 풍모를 잘 보여준다. 통일신라 이후 선종(禪宗)의 대유행과 궤를 같이 한 스님 초상은 연이은 줄기찬 고승의 배출과 함께 줄기차게 이어져 오늘날도 계속 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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