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16) 고려의 경기인 道가 본관인 성씨 인물 ⑤수주최씨와 '최루백'

   
▲ 경주최씨, 해주최씨와 함께 고려 전기 3대 명문 최씨가인 수원최씨의 사적지로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위치해 있다. 김동성기자

<16>경기도가 본관인 성씨 인물-수주최씨

이재범 경기대교수

수주최씨는 수원최씨라고도 하는데, 그 연원은 수주지역의 지명과 지역의 변천에서 유래한다. 수주최씨는 경주최씨, 해주최씨와 함께 고려 전기 3대 명문 최씨가로 일컫고 있다.

수주최씨의 유래는 낭천군(강원도)인지 계림(경주)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들이 어떤 경로로 수원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수주 일대에서 성장하게 된 경위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수주최씨가 역사의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南征)을 할 때이다.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이때 수원에서 김칠과 최승규 등이 200여 명을 이끌고 왕건을 도왔다고 한다. 당시 왕건은 이 지역에서 상당히 고전하였던 것은 광교산의 명칭이 바뀐 것으로 알 수 있다. 광교산은 본래 광악산이었는데, 왕건이 이 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전승을 하여 광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김칠과 최승규의 공로로 왕건은 본래 수성군이라는 군 단위에서 수주라고 하여 주 단위의 광역 개념 행정 단위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리고 김칠과 최승규는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중앙문벌귀족으로 성장한 수주최씨

수주최씨는 재지세력과 중앙귀족으로 분화된 대표적인 성씨이다. 수주최씨가 고려의 명문거족으로 성장한 시기는 최사위가 중앙귀족으로 커나가면서부터이다. 최사위는 최승규의 일족이라고 추정되는 최서천의 증손자이다. 이미 최승규는 삼한공신이 되어 중앙귀족화 되었던 수주최씨는 그 일족인 최서천이 재지세력을 대표하던 호장직에 있었다는 점에서 중앙귀족과 재지세력으로 동시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호장직에 있었던 최서천의 가계도 그의 둘째 아들 한용이 상경종사하면서부터 중앙귀족화 하였다.

한편 최서천의 장자는 부업을 승계하여 계속 재지호족으로 존재하였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중에 수원호장의 아들로서 의종조에 한림학사를 역임한 최루백은 바로 수원에 토착해 오던 최서천 장남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주최씨는 현종조 최사위의 출세로 일약 명문이 되었다. 그의 6자 1서(胥)가 모두 요직에 포열해 있었고 그의 장자 충공은 5자, 그의 손 유서는 4자가 모두 고관요직에 있었으며, 당대 명문인 인주이씨, 강릉김씨, 경주김씨, 장흥임씨 등과 혼인을 통하여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최사위 자신은 1009년(목종 12)에 김치양(金致陽)이 난을 일으켜 목종을 폐하려 했을 때, 대정문별감(大定門別監)에 임명되어 궁문을 폐쇄하고 국왕을 호위하였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이 침입하자 통군사(統軍使)로서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거란군의 공격을 막았으나 패배하였다. 다음 해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했으며,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와 서경유수를 거친 다음 이부상서로 옮겼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사내 랑)平章事)와 문하시랑평장사를 차례로 역임하는 등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1019년에 추충좌리동덕공신 청하현개국남(推忠佐理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으로 봉해졌다. 1021년에는 광국공신(匡國功臣)이 더해지고 개국백(開國伯)으로 작진(爵進)되었다. 관직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檢校太師守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에 올라 총재가 되었다. 1027년에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하였으며, 1031년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한 뒤 1041년(정종 7)에 죽었다. 1052년(문종 6) 현종묘정(顯宗廟庭)의 배향공신이 되기도 하였다.

최사위가문은 후손이 번창하여 누대에 걸쳐 내외자손이 조정에 분포되어 있는가 하면 그 일문에 고관 문한 훈벌을 겸비한 명문으로서 중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가 무신란을 계기로 점차 몰락하고 말았다. 수주최씨는 해주최씨와 비슷한 특징의 가문으로서 관료적 성격이 강했다. 다른 문벌귀족과는 다르게 비빈은 직접 나오지 않았으나 최계방은 당시 외척인 경주김씨 김원황의 외손이자 그의 어머니는 숙종의 비인 유씨의 어머니와 자매였다.

한편 불교계로 진출한 최사위 후손으로서는 최계방의 둘째 아들인 수리사 주지였던 관오, 최유청의 동생으로 현화사 승통을 지냈던 상지 등이 있다. 특히 관오는 승속 양계에 걸쳐 많은 활약을 하였다.

   
최루백효자비각 - 최루백은 그의 관직생활보다도 그의 효행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최루백 효자비각은 고려 의종 때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원지 비각이다. 화성시향토유적 제 2호로, 수원최씨사적지에 보존되어 있다.

#효자 최루백(崔婁伯 : ?~1205)

수주최씨 가문의 인물로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인물이 최루백이다. 최루백은 수원의 향리 상저의 아들로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하였다. 1153년(의종 7)에는 기거사인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國政) 자문에 응하기 하였던 인물이다.

최루백은 그의 관직생활보다도 그의 효행으로 조선시대에도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15세 때에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그러자 최루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호랑이를 찾아 죽여 아버지의 뼈와 살을 거두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安葬)하였다. 그리고 호랑이의 고기를 자신이 다 먹었다. 그리고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던 효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시묘중인 어느 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奉養)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가 시종이 없다 이를 소냐.”라는 시를 읊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최루백과 관련된 내용은 비록 결락은 심하지만 그의 묘지명이 남아 있어서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효행으로 인하여 ‘고려사(高麗史)’열전에 실렸고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도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이 있는데, 원래의 비각은 봉담면 수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한다. 현재 그의 묘와 효행비가 있는 일대는 국가에서 최루백에게 내렸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한다. 현재의 정려비(旌閭碑)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앞면에 ‘고려효자한림학사최루백지여(高麗孝子閑林學士崔樓伯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뒤쪽 7m지점에는 최루백의 부 최상저의 유허비 비각이 최근에 건립되었다. 그의 관직은 조산대부 국자좨주(朝散大夫 國子祭酒)에 이르렀고, 부인인 염경애(廉瓊愛)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다. 그리고, 염경애의 사후 다시 재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최루백의 처 염경애(廉瓊愛 : 1100~1146)

수주최씨와 관련하여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인물이 염경애이다. 염경애는 봉성염씨 염덕방(廉德方)의 딸로, 25세에 최루백(崔婁伯)에게 시집왔다가 47세에 별세한 고려의 여성이다. 염경애는 최루백과 결혼하여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녀의 남편인 최루백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여성의 지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염경애의 묘지명은 상태가 좋아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염경애는 우리나라의 여성 가운데 성과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많지 않은 여성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의 묘지명에 따르면 사망한 뒤 화장을 하였다가 친정 아버지의 묘소 부근에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여성의 미덕에 대하여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고 표현하였고, ‘문자(文字)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던 것을 기록해 두었다. 또한 남편 최루백이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수령으로 발령을 받게되자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함께 갔으며, 군사(軍事) 관계에 종사하자 가난하고 추운 규방(閨房)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엄환((고자 엄)宦, 內侍)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간의 일들은 다 적을 수가 없다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여성들의 지위가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묘지명을 작성하였던 것도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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