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17)고려의 경기인. 道가 본관인 성씨 인물 ⑥ 여흥이씨와 '이규보'

   
고려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묘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위치해 있으며 인천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됐다. 사진은 이규보 묘의 전경. 제공=강화군청

 

<17>경기도가 본관인 성씨 인물-여흥이씨, 이규보(李奎報)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격동의 삶, 이규보의 생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 후기 무인집정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문장가였다. 문벌귀족의 폐단이 극에 달해 무신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168년(의종 22)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룻밤사이 엎어지고 일어서는 무인들의 권력 다툼,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과 전염병, 전국 각 지역에서의 민란, 몽고의 침입과 강화로의 천도 등 평생을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중후반까지 우리 근현대의 전철과 닮아있다. 격동의 삶이었다. 어려서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으나, 세 번의 실패 후인 22살 때 네 번째 과거에서 겨우 급제했다. 관직에 나가기 위해 급제 후 10년을 기다려야 했고, 관직에 나가서도 파면과 좌천, 유배, 복직 등을 거듭하며 60대 후반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봉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끼니를 굶는 지경에도 그는 국정 전반을 책임지며 한 시대의 모든 책무를 어깨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런 이규보는 고려 전기에 편찬된 역사서인 ‘구삼국사’를 토대로 고구려 동명왕의 신이(神異)하고 영웅적인 사실을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서사한 ‘동명왕편’을 저술한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인저(仁氐)였다. 사마시를 앞두고 있던 22세 때인 1189년(명종 19) 네 번째의 응시를 앞두고 꿈에 장원할 것을 알려준 규성(奎星)의 예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규보(奎報)로 고쳤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며, 본관은 황려(黃驪, 여주)였다. 아버지 이윤수(李允綏, 후에 벼슬은 호부낭중)와 울진현위를 지낸 김시정(金施政)의 딸인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본관을 여주에 두고 있었지만, 서울에서 살던 경관자제(京官子弟)였다.

그렇다고 본관을 지방에 두고 개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문벌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이화(李和)는 무반직인 교위를 지냈고, 증조부 이은백(李殷伯)이 황려현의 향리(鄕吏)을 지냈다. 처가는 대부경(大府卿)을 지낸 진승(晉昇)이었다. 그의 집안은 조부 때 개경으로 이주한 지방 향리 출신의 중소지주였다.

이것은 이규보가 무인집권기에 출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원인이기도 했다.

#고향 여주, 첫 번째 방문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관직에 따라 개경과 지방을 오가며 자랐다. 무신난이 일어났던 1171년(명종 1)에 4살의 그는 성주(成州, 평남 성천) 수령으로 나간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3년을 살았고, 14세 때에는 최충이 세운 학교인 문헌공도의 학생이 되어 성명재(誠明齋)에서 수학했다. 16세 때인 1183년(명종 13) 봄에는 부친이 수주(水州, 수원)로 나가자 서울에 남아 국자감시를 준비하다가 낙방하여 가을에 내려가 또 3년을 살았다. 그 중간에 국자감 시험을 위해 서울을 오가며 35살 연배인 오세재(吳世才)와 망년우를 맺기도 하였다.

그런 이규보가 여주를 처음 찾은 것은 29세 때인 1196년(명종 26) 5월이었다. 이해 4월에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큰 매형이 황려로 귀향가자 누이와 함께 매형을 찾은 것이다. 이때 그가 황려에서 머문 시간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34년 후인 1230년(고종 19) 11월에 전라도 위도(猬島)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월 고향으로 옮겨지면서 6개월을 황려에서 살았다. 74년의 평생 동안 본관인 여주에서의 생활은 고작 7개월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유배내지 불우한 삶에서 잠깐의 방문이었다. 그에게 본관인 여주는 어떤 곳이었을까. 과연 여주는 그에게 고향으로 느껴졌을까.

1196년 5월 여주로의 첫 발길을 내딛으며 개경의 동문을 나서면서 이규보는 그 심정을 읊었다. “한 발 한 발 고향 길을 향하며 / 유유히 성문을 나서는데, 떠나는 심정 진정할 길 없어 / 슬픈 눈물 두 뺨에 비 오듯 하네(‘동국이상국전집’ 제6권, ‘진년(辰年) 오월에 황려에 가서 놀려고 막 동문을 나서면서 말 위에서 짓다’)” 그 또한 “황려는 나의 고향”이라고 여주와의 연고를 밝히고 있지만, 그 마음은 편치 못했다. 유배된 매형을 만나려는 귀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정은 개경→임진강→사평진(沙平津, 용산)→쌍령(雙嶺, 용인)을 거쳐 여주로 가는 길이었는데, 병든 누이를 시중하며 어렵게 도착한 그의 마음은 한 고비를 넘긴 듯 안도감이 먼저였다.

고개 넘어 강 머리를 베고 있는 여주 고을은 봉래산을 옮겨놓은 듯 했고 풍진(風塵)으로 가득한 서울과 달리 평안하고 비옥하기 그지없었다. 고향의 첫길에서 그는 호적을 뒤져 친척을 찾고 선대부터 전해오는 농토를 찾아보았다(제6권, ‘처음 황려에 들어가면서’). 고향의 2~3명과 여주강이 내려다보이는 마암(馬巖, 여주읍 상리)에서 놀고 술에 취해 하령사(下寧寺)를 다녀왔다.

여주의 진사 이대성(李大成), 황려현령 등이 기생을 부르고 피리, 거문고 등이 어우러진 강루(江樓)에서의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또 여주향교의 생도들도 배를 띄워 주연(舟宴)을 벌였다. 매 잔치마다 그는 대취했다.

경관자제였지만 아직 출세하지 못한 이규보에게 한 달의 고향 방문은 마지못한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낯도 설었다. 하지만 그는 뜻밖의 환대를 받았다. 현령은 물론 진사, 여주향교의 생도들까지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여주었다. 여주에서 그의 집안은 그래도 출세한 편에 속해 자랑으로 여겼을 법하다. 그는 관아에서 호적을 살펴 친척을 찾고 근곡촌(根谷村)에 위치한 물려받은 토지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낙향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물론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또 상주수령이었던 둘째 매형과 함께 지내던 어머니를 찾아뵙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인 9월 말에 다시 고향을 경유했다.

이때의 마음은 지난 5월보다 한결 가벼웠다. 여정 중에 충주에서 경험했던 잠자리에서 어여쁜 기생들이 부리는 애교조차 그 길을 막지 못했다. 이때 여주에서 머문 날은 열흘로 지난번과 같이 이대성, 향교 생도들과 진하게 어울렸고, 빙정사(氷靖寺)를 찾기도 했다.

   
   

#고향 여주, 두 번째 방문

이규보가 두 번째 고향 방문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1231년 정월이었다. 전년 11월에 전라도 위도로 유배되었다가 고향으로 옮겨지면서이다. 이때에는 6개월을 살았는데, 죄인으로 찾은 그 처지는 첫 번째 방문이었던 20대 후반보다 더욱 어려웠다. “…알지 못하네 어느 곳이 술집인가 / 요기는 오직 이 산의 고사리뿐일세. 오전에 밭에서 김매기 하였더니 / 짚신에 흙 천지이고 이슬은 옷을 적시네(제17권, ‘황려의 여사(旅舍)에서 짓다’)”. 정천사(井泉寺)·북사(北寺) 등을 찾아 시를 읊기도 했지만, 몸소 흙과 뒹굴며 노동을 해야 했다.

여주에서의 생활은 따분하여 새소리조차 싫었고, 더위와 비를 걱정해야하는 생활이었다. 때문에 “내가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하는 ‘돌돌괴사(꾸짖을 돌, 꾸짖을 돌 怪事)’ 넉 자만 쓰고 후회와 한탄을 하며 자신을 궁하게 만든 하늘을 원망했다. 그의 마음은 서울인 황도(皇都)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정계 복귀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해 7월에 사면된 이규보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고향의 현령이었던 류경로(柳卿老)에게 너그러움과 용감함을 겸비하고 현명함으로 백성들의 나쁜 구습을 바로 잡고 탐관오리들도 그릇됨을 깨우치라고 당부했다.

복귀에 대한 자신의 다짐이기도 했다. 이후 류경로와의 교유는 지속되었다. 그는 이규보에게 꿩 등의 선물과 함께 간간히 안부를 묻고 시로 소식을 전하였다. 류경로가 국자박사로 한림원의 직무를 맡자 이규보는 축하하는 시를 보냈고, 이규보가 죽은 후 그는 사신으로 두 차례나 몽고에 다녀왔다.

#이규보의 초상

수염은 거칠고 더부룩하고 / 입술은 두텁고 붉네. 이 어떤 사람인가 / 춘경(春卿, 이규보)과 같기도 하네. 과연 이 사람이 춘경이라면 / 그림자인가 실제 모습인가 / 실제 모습이라면 오히려 허망하여 / 오직 꿈만 같거니와 / 더구나 이것이 그림자라면 / 꿈속의 꿈일 따름이라네 / 오십여년 세월의 부침(浮沈)에 / 구구한 이 한 몸뚱이를 / 한 폭의 비단에 들여 놓으니 / 그 겉모양은 사람도 같으이 / 마음을 그리기란 매우 어렵지만 / 살포시 진영(眞影)에 드러났으니 / 무릇 내 자손들아 / 나의 추한 모습 웃지 말라 / 다만 그 마음을 전한다면 / 조상들께 욕되진 않으리라(제11권, ‘정이안(丁而安)이 나의 초상화를 그렸기에 스스로 찬을 짓다’)

묵죽화(墨竹畵)에 명성이 있던 정홍진(丁鴻進)은 71세의 이규보를 초상으로 그렸다. 당시 무인집정자였던 최이(崔怡)는 그의 묵죽화를 보고 감탄하여 ‘동국이안지장(東國而安之章)’이라는 인장을 새겨 선물하였고, 정홍진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자신의 작품임을 나타내기 위해 그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묵죽에 대한 명성보다 문인으로서의 문필(文筆)을 중요하게 여겼다. “사대부가 붓을 휘두를 때는 대체로 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그림에 탐닉하면 바로 화공(畫工)”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정3품인 비서감까지 지냈던 그는 이규보와 오랜 벗이자 동료였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이안(而安) 또는 정이안(丁而安)으로 등장하는데, 그 또한 이규보가 지어준 것이었다. 정홍진은 묵죽을 그려달라는 이규보의 요청에 간간히 응했고, 둘은 시를 지어 응답했다. 이규보가 아플 때에는 장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며 한 술 하던 그에게 술을 보내 위로하기도 했다. 또 일찍이 노죽(露竹)·풍죽(風竹)·노죽(老竹)·신죽(新竹) 등 네그루의 대나무를 그려 주어 이규보는 이에 대한 찬(贊)을 짓기도 했다. 초상화 역시 이규보의 청에 의해 그린 것이었다. 묵죽 네그루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한 이규보는 비단을 사가지고 가서 몇 떨기의 묵죽과 함께 초상을 청했고, 얼마 후 정홍진은 묵죽 2점과 함께 초상 1점을 가지고 직접 이규보를 찾아왔다.

초상화 속의 이규보는 거칠고 덥수룩한 구레나릇에 붉고 두터운 입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열 겹으로 싸서 비장(祕藏)하여 자손 만세의 가보로 전하겠다던 그의 다짐과 달리 이 초상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규보는 구체적인 묘사를 하지 않았다. 단지 추한 모습에 웃지 말 것을 자손들에게 당부하고 있을 뿐.

털이 빠져 머리가 온통 벗겨지니 / 나무 없는 민둥산을 꼭 닮았네 / 모자를 벗어도 부끄럽지 않지만 / 빗질할 생각은 이미 없어졌다네 / 살쩍과 수염만 없다면 / 참으로 늙은 까까중 같으리 / 갓과 고깔로 정수리 꾸미고 / 말 타고 마부까지 거느리며 / 누른 옷차림 둘이서 끌게 했더니 / 길거리선 깔깔거리며 떠들어대네 / 행인들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여 / 쫓기듯이 달려 서로 피하네 / 실상은 망령되고 용렬한 이 사람 / 나라에도 아무 쓸모가 없다네 / 배 하나만 뚱뚱해가지고 / 국록(國祿)만 실컷 먹었을 뿐이네 / 내가 생각해도 얼굴이 두꺼운데 / 남들이 어찌 조롱하지 않으리 / 속히 그만두고 들어앉아 / 누추한 꼴 더하지나 말아야지(제18권, ‘대머리를 자조(自嘲)함’)

65세 때 이규보의 모습이다. 크지 않은 키, 뚱뚱해서 볼록 튀어나온 배, 민둥산을 닮은 대머리, 유난히도 눈에 띄는 귀밑털과 구레나릇, 두툼하고 붉은 입술. 그는 말도 더듬거려 어눌하였다. 이규보는 그런 외모에 대해 불만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때론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는 자신이 싫기도 했지만, 정홍진의 초상은 겉모습보다 자신의 마음을 그린듯하여 꽤 만족해 하였다. 하긴 오랜 벗이었으니 그 초상화에는 70대 전형적인 할아버지의 외모와 더불어 이규보의 성품과 버릇까지 세세하게 담았을 것이다.

작은 키와 불룩한 배의 70대 대머리 할아버지 이규보, 그에게 고향 여주는 어떤 의미였을까. 대부분 본관과 떨어져 사는 우리,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이규보. 따뜻한 추억을 담은 고향이 그에게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고려시대 대부분의 관료와 그 가족들은 현재 우리를 닮은 고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